강화군 양도면 인산리에 위치한 조각가 최은경 교수(이화여자대학교)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널찍한 정원에 동물원을 연상시키듯 백색의 사슴 조각과 야생 동물인 치타의 조각들이 바위와 나무들과 어울려 제각기 자리를 잡고 서있다. 원형 제작실과 성형실에는 다양한 공구들과 모형작품들 그리고 한창 작업 중인 자취들이 보인다.
독립적으로 분리된 본관은 흡사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그동안의 작품들을 벽면과 기둥, 그리고 공간에 깔끔하게 설치해서 작가의 감각이 돋보이는 백색 공간이다. 그 옆쪽에 배치한 공간은 작품을 구상하며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휴식공간이며 세련된 인테리어로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향기로운 국화차를 건넨 작가는 작품에 관한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최은경 작가에게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된 계기, 혹은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다. 생활환경의 변화였던 미국 뉴욕에서의 삶이 인생의 최악이면서도 최고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작가를 그만두려고 찾아 갔었던 다른 나라 낯선 곳에서의 삶이 뜻하지 않게 인생과 사고의 전환점이 되면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고민들로 스스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충분하지 못해서 세탁소 일을 시작으로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해야 했으며, 특히 여자라는 이유,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합당하지 않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당하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국땅에서의 처절했던 삶을 모습을 회상하는 그의 눈가에는 이내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예술은 철학이다. 철학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작업은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뽑아내면 된다. 억지스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최 작가가 다녔던 미국의 대학교수가 그에게 해준 말이다. 솜털 하나하나까지 느낄 수 있도록 설명해주던 좋은 스승을 만나면서 드디어 새로운 작품세계의 장을 열게 된 것이다.
2000년쯤부터 책을 소재로 하며 책의 형태를 빌려와서 작업하는 최은경 작가의 조각들은 인생에 대한 혹은 사회에 대한 그의 은유적 선택인 것이다.
비록 나라마다 문화권은 달라도 본질적인 기능이 같을 수 있는 책은 고귀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한 책의 기능과 소중함 그리고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변질된 지식인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책이 주는 지혜가 있으며 가르침이 있지만 세상은 그 책의 내용대로 움직이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작가의 책 조각은 정의롭지 않고 가식적인, 공평하지 않고 차별적인 이 세상에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 반성의 시간을 권고하는 메시지로 시작되었고, 책 조각과 함께 동물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책의 관계에 대해 들어보기로 하겠다.
“책은 인간이 만들어낸 지식의 산물인 오브제(기성품)인 것인데, 인간은 책을 만드는 동물이다. 인간은 화려한 언어와 문자로 책을 만들어 자신의 지성과 정신을 구현한다. 인간은 책이라는 아름다운 형식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표현한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인간은 그 끝없는 욕망을 책이라는 수사학으로 치장한다. 인간은 책으로 무엇을 가르치려 한다. 도덕을 말하고 정의와 정직과 겸손을 쉼 없이 강조한다. 그러나 저 야생의 동물 치타는 욕망에 불타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욕구만 갖고 있다. 시속 130km로 달릴 수 있지만, 오직 배고플 때만 사냥한다. 지식과 욕망을 책이라는 미학으로 담아내는 인간의 반대편엔 저 초원에서 소유하지 않고 오직 존재하는 동물 치타가 있다.” (Books & Wild Animals 전시 중에서)
이 전시에서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되어 쌓여 있는 책들과 백색으로 조각된 치타가 하나의 공간에서 함께 공존하는 형상을 이룬다. 이런 공간에 인간이 들어서면 책(스테인리스 스틸)에 비춰지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이 동시에 비춰진다. 이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욕망의 끝이 없는 인간과 소유하지 않고 오직 존재하는 동물 치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FORGIVENESS(용서)"에서 보여 지는 작품은 백색의 사슴이 거대한 책의 형상과 함께 등장한다. 책에 새겨진 ‘MOTHER’의 마음과 순한 사슴의 형상이 그것이다.
세상의 처절함을 경험하고 목격한 그의 내면은 이제 분노와 증오에서 용서하고 용서받음으로 전환된 것이다.
최은경 작가는 삶 속에서 경험을 통한 그리고 느끼는 것에서 만들고 설치한다.
이론적 근거보다 숨 쉬고 호흡하는 속에서 작품이 나오는 것이며 그렇기에 예술가이기 보다는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말을 이야기할 뿐이며 그 이야기의 방식이 조형언어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작업 방향이나 계획에 대한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강화에서 홀로 서있는 시간들… 인간에 대한 고민들이고 세상에 대한 고민들이다. 이러한 고민들이 끝날 때 작업을 그만둘 것 같다. 그리고 본인의 존재가 귀함을 느낄 때 다른 이의 존재도 귀함을 알 수 있다. 그래야 좋은 사람 좋은 작가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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