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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더] 서예 산증인 근당 양택동 선생

조선시대 중기부터 한국 대표 서화 수두룩
6천여점 시가 30억여원 가치 수원시에 기증
수원박물관 한켠에 전시하는게 너무 아쉬워

 

한국 서예사가 시작된 것은 한자가 들어온 시기에 관해서는 확실한 문헌이 없으나 대체로 B.C. 2~4세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의 문자 자료는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다만 전한(前漢)시대의 명문(銘文)에 새겨진 동경(銅鏡)이 평양지방에서 발견된 일이 있고 그 후 낙랑군(樂浪郡) 유물로 와당(瓦當)이나 전(塼) 등이 출초된 바 있다.

우리나라의 서예는 당초부터 중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발전되었으며 왕희지, 구양순, 안진경, 우세남 등이 많은 영향을 끼친 서가들이다.

특히 서예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이다.

근당 양택동(梁澤東·62) 선생. 그가 바로 한국 서예의 역사를 지키고 계승해 온 서예의 산증인이다.

그래서 일까.

그를 만난 지난 7일 늦은 오후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방안 가득 그의 작품들에서 진한 먹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양택동 선생은 딱딱할 것 같았지만 손수 차를 내오고 계속 마시길 권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건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와줘서 고맙다”는 그는 “찾는데 어렵지 않았냐. 추운데 고생이 많다”고 반갑게 맞아줬다.

서예에 첫 발을 내딛게 된 동기가 궁금했다.

의외로 간단했지만 또한 서예 시작이 순탄치많은 않았음을 들을 수 있었다.

“어렸을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셨는데 당시에는 붓으로 모든 약재 등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서예는 자연스럽게 제게 다가 올 수 있었던 것 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서예를 시작하게 됐지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한의학과를 가기를 원하셨죠. 한약방으로 3대를 잇길 바라셨지만 제가 서예를 시작하면서 20대 이후에는 아버님과 10년동안 의절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는 제가 성공한 모습을 보여드린다면 인정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10년이 지난 후에 아버님도 저를 인정해 주셨어요. 참 어렵게 시작했죠.(웃음)”

양 선생은 본격적으로 서예에 입문해 지난 1974년 수원에 서실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좋은 작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또 70년대 후반 중국 출·입국이 자유롭지 못한 정치적인 상황에서는 대만으로 건너가 중국의 서예를 익히게 됐고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의외로 작품을 많이 수집할 수 있었던 계기가 간단했다.

“지인들이나 대만,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 저에게 그림을 좀 그려달라고 부탁을 받고 그림을 그려줬더니 이후에 ‘너무 고맙다’면서 집에 보관하던 그림을 저에게 주는 거에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림을 많이 수집할 수 있었고 받았던 그림 중에는 서예의 역사를 보여주는 그림도 많이 있었습니다. 또 1985년에는 서울 인사동에 서실을 또 하나 만들어서 그곳에서도 그림을 수집할 수 있는 통로가 됐습니다.”

하지만 평생토록 애써 수집했던 조선시대 중기부터 현대까지 서화가 작품 6천여점 시가 30억여원 가치를 수원시에 기증했다.

그에게는 평생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한국 최초의 ‘서예박물관’.

“서예 인구가 1천만이 넘습니다. 선배들이나 서예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좋은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계시는데 이것을 대중들에게 알릴 길이 없었어요. 기증을 해서 후배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고 싶었습니다. 저도 가족들과 주위의 반대가 많았지만 서예박물관이 있어야한다는 일념으로 제가 갖고 있던 작품들을 선뜻 내 놓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한국 최초의 서예박물관 설립은 쉽지 않았다.

“심재덕 전 수원시장이 재직할 당시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기증할테니 박물관 설립을 해 달라고 요구해 현재 수원미술전시관 자리에 박물관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앙박물관에서 타당성 조사를 했는데 방죽을 메워서 건립한 건물이라 박물관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연락을 받고 좌절하게 됐습니다. 이후 지난 2003년 5월 당시 김용서 수원시장을 찾아가 다시 건의하게 됐고 드디어 2008년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양 선생은 그러나 표정이 밝지 못했다.

“왜 그러시죠”라는 질문에 “현재 개관한 수원박물관에는 수원역사박물관, 한국서예박물관, 사운이종학자료관이 함께 있다는 것이 아쉽다”는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박물관인데 수원박물관 안에 있다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수원을 대표하는 서화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중기부터 현대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서화가 있는데 수원박물관에 있다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 하루 빨리 독립적으로 한국서예박물관으로 운영이 되야 한다”라고 토로했다.

특히 서예 활성화와 발전을 위해 경기도의 역활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제가 부러운 것이 있는데요. 전북에서 지난 1995년부터 시작된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입니다.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서예비엔날레는 올해도 10월에 열리게 돼 그곳에서 조직위원을 맡아 세계 유명 작가를 추천해 줬어요. 어느세 비엔날레가 열리는 기간에는 전주를 비롯해 전북 전체가 축제 분위기 입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전북에서는 서예박물관을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95년 이후 근대 서화들이에요. 수원박물관에 있는 서화들하고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경기도도 적극 나서서 독립적인 서예박물관을 만드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근당 양택동 선생은 올해 특별한 계획도 갖고 있었다.

생예 두번째 전시를 기획한 것.

지난 1996년 첫 전시 이후 꼭 15년만이다.

문인화와 서예를 접목해서 그린 서화들을 대중들에게 전시하고 알리는 일이지만 오랜만에라서 그런지 조금은 떨리는 표정을 옅볼 수 있었다.

“원래는 회갑때 특별전을 열려고 했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2년이 지난 올해 전시회를 열려고 생각 중입니다. 지속적으로 전시를 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실력이 늘지 않았기 때문이죠. 2~3년 더 해서 글씨가 늘지 못한다고 느껴요. 5년 이상이 되야 글씨가 늘어간다는 것을 느끼게 되죠. 그래서 전시가 다소 늦어졌습니다.”

근당 양택동 선생에게 ‘서예’란 어떤 의미이지 묻자 ‘정서와 이지의 결정체’라고 한 문장으로 결정지은 뒤 “서예는 동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글이나 그림에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면서 “실질적으로 서예는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설명했다.

“전용박물관 조속 개관 염원 서예 발전위해 道역할 필요”

약 력

-한국서예박물관장(현)

-(사)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재)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운영위원(현)

-(재)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공모대전

심사위원장

-(사)동아시아 전통문화연구원이사(현)

-(재)대한민국화성서예대전 집행위원

장(현)

-한국여성미술대전 심사위원

-브라질국제서예대회출품

-독일 한글서예전 출품

-(사)해동서예학회 이사

-(사)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

-(사)국제서예가협회한국본부이사(현)

-(사)대한민국해동서예대전 심사위원장

-한국·중국서예비엔날레 출품

-대만현대서예대전출품

-일본평성천도1300년기념국제교류전 출품

-한국미술 100인초대전

-한국서예 100인초대전

-국전특선작가 팔인전 출품

-전주대학교 출강

-중앙승가대학교 출강(현)

-한국현대서예연구원장(현)

-삼무재 주인

-수원시정책자문위원

-(사)무예이십사기보존회이사(현)

-(사)경기문화발전소이사(현)

-(사)경기도서예대전 심사위원장

-(재)한국청년작가선발 심사위원

-(사)수원시 서예대전 심사위원장

-근당 양택동 개인전(1996)

-근당 양택동 작품집 출판 (2007)

/사진=최우창기자 smi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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