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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변동림 또는 김향안처럼

 

요즘 이상(李箱·1910~1937)을 다시 읽으면서 갑자기 생각나는 말이 있다. 그 말은 20대 시절, 내 친구가 편지로 보내준 것이기도 했는데 이는 다름 아닌 단편 ‘실화(失花)’의 첫머리에 나오는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었다’는 구절이다.

이 뿐 만이 아니라 이상은 시인답게 단편의 도입부를 시적인 언어로 장식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날개’에서는 ‘육신이 흐느적 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라 했고, ‘봉별기’에서는 ‘스물 세 살이오. 3월이오, 각혈이다’라 했다. 그렇다면, 이상의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이상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공연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잊었던 이름, 그 여자가 내게로 다가왔다.

두 명의 천재와 살다 간 여자가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변동림(卞東琳·1916~2004), 또는 김향안(金鄕岸)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시인 이상의 아내였을 적엔 변동림이었고, 화가인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1913~1974)와 재혼해서는 김향안으로 살았다.

1930년대 경성(京城)의 최고 트렌드는 ‘자유연애’였다. 자유연애를 빼놓고는 이 시기 ‘모던’ 경성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유행했다. 1916년 경성에서 태어나고, 경성여고보(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를 중퇴한 신여성 변동림 역시 자유연애론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변동림은 이상이 단골이었던 다방 ‘낙랑’에서 알게 된 당대의 지식인 변동욱(卞東昱)의 동생이자, 이상의 절친한 친구인 꼽추 화가 구본웅(具本雄)의 서모(庶母) 변동숙(卞東淑)과는 이복지간이었다.

이상이 변동림을 ‘낙랑’에서 처음 만났을 때, 평소 위트와 패러독스로 좌중을 압도하던 그답지 않게 각설탕만 만지작거리며 말도 제대로 못했다. 이상은 변동림 주변의 애인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당당한 시민이 못 되는 선생님을 저는 따르기로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자,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36년 6월 서둘러 신흥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황금정(黃金町)의 허름한 셋집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이상은 종일 누워 지냈다. 햇빛을 보지 못한 이상의 얼굴은 더욱 하얘졌고, 폐결핵은 깊어갔다. 변동림은 이상의 약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카페에 나갔다. 앞선 동거녀 금홍의 방종한 남자관계에는 그토록 관대했던 이상이지만 변동림의 정조(貞操)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이상이 변동림의 남자관계를 캐는 장면은 단편 ‘동해(童骸)’와 ‘실화’에 등장한다.

두 사람의 신혼살림은 이상이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파경(破鏡)을 맞는다. 불과 넉 달이 채 못 되는 짧은 결혼생활이었다. 변동림은 이상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몇 달 뒤 날아온 것은 이상이 동경제국 부속병원에 입원했는데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소식을 듣고 동경으로 달려간 변동림에게 이상은 ‘레몬 향기가 맡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1937년 4월 17일이었다.

변동림은 이상과 사별한지 7년이 되는 1944년 5월 일본 시인의 소개로 세 아이의 아버지인 수화와 재혼을 한다. 그 후 수필가로 등단하며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꾼 그녀는 1955년 수화보다 1년 앞서 파리로 그림 유학을 떠난다. 먼저가 자리를 잡겠다는 남편에 대한 배려에서였다. 수화의 파리시대는 당시 유행하던 ‘앵포르멜’도, ‘미니멀니즘’도 아닌 자신 만의 독특한 미술양식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다. 한국 추상화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수화에게 김향안은 ‘뮤즈(Muse)’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2004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국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이상과 수화를 기리고 그 예술세계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인의 아내 4개월, 미술가의 아내 30년을 이렇게 회고했다. “시인 남편은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 천재는 미완성이다. 또 지치지 않는 창작열을 가진 화가 남편의 동반자로 살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4월, 봄꽃의 분분한 낙화를 보면서 시대에 당당히 맞서 살다간 그녀의 인생을 여기 적는다. /이해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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