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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아내의 생일

 

담장을 기어 오른 새빨간 넝쿨장미가 사랑을 토하는 아침나절이다. 오늘도 바쁜 일로 정신이 없는데 현정이 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빠가 지금은 바빠서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이따 다시 걸라고 하고 얼른 끊었다. 현정이는 하루에 한 두 번씩 나에게 꼭 전화를 한다. 무슨 일이 있어서 할 때도 있지만 그냥 할 때가 더 많다. 그래도 나는 현정이의 전화를 받으면 마음이 기쁘다. 오늘은 나더러 통화를 해도 괜찮겠냐고 묻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무슨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현정이와 말을 더 하고 싶었으나 전화를 오래 붙들고 있으면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스스로 조심을 한다. 어떤 날은 일이 너무 바빠 전화를 하거나 받을 시간조차 없을 때도 있다. 눈치 빠른 현정이도 아빠의 이런 사정을 알아차린 듯 긴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이 직장에 입사를 한지도 어느덧 1년 반이나 됐으니 세월은 정말 빠르다. 이곳은 내가 건강 때문에 선택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아주 소중한 일터다.

입사를 했을 당시에는 처음 해 보는 일이라 힘도 들고 실수도 많아 애를 많이 먹었다. 그럴 때 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참고 또 참았다.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동현이는 아빠한테서 흙냄새가 난다고 하고 현정이는 손등에 난 작은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면서 무슨 일을 하다가 긁혔냐고 하면서 가슴 아파했다.

힘들고 고된 생활은 마침내 나를 이 직장에서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어 줬다. 나는 이런 과정을 통해 이전에 소홀히 여겼던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그리고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먹기에 달려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아침부터 먹장구름으로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빗줄기가 오락가락 하더니 한 차례 굵은 장대비가 시원하게 내렸다. 한나절이 지나서 맑게 개인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눈부셨다. 파란 풀밭을 날아다니며 꽃잎에 입 맞추는 금실 좋은 호랑나비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여름의 자연은 조용하면서도 아름답다. 진정한 아름다음은 침묵 속에 말없이 찾아 오는 것 같았다. 오후 늦게 현정이가 또 전화를 했다. 오늘 저녁에 집으로 올 때 장미꽃을 사오라고 했다. 그것도 빨간 색으로 꼭 한 송이만 사오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감이 잡히는 것이 있어 얼른 달력을 들여 다 보았다. 바로 내일이 아내의 생일이었다.

내가 아내와 결혼을 한지도 벌써 20여년이 흘렀다. 그런데 아내의 생일을 제대로 기억한 날은 몇 번 안 되는 것 같았다. 생일을 기억했어도 그냥 넘어 가 버렸다. 바빠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미안한 마음뿐이다.

나는 꽃집에서 탐스런 장미 꽃 한 송이를 사들고 집으로 들어 왔다. 식탁에 앉아 있던 현정이가 나를 보고 두 손을 벌려 하트 모양을 하며 달려 왔다. 동현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청소기를 돌리다가 머리를 꾸뻑거렸다.

아이들이 엄마의 생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정이가 냉장고 문을 열고 커다란 케익을 꺼내 보이며 그동안 용돈을 모아 샀다고 했다. 아마 아이들에게는 세상에서 엄마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엄마의 사랑의 빛깔 보다 더 짙고 고운 색은 없을 것이다. 또한 아내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 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현정이가 엄마가 이모네 가게가 너무 바빠 도와주고 내일 온다고 했다며 서운해 했다. 아내는 나 보다 더 바쁘다. 집안 살림에 대학 수능 준비를 하는 아이들을 챙기고 언니네 집에서 가게 일을 도와야 한다. 아내는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들어왔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 앉아 케익위에 촛불을 켰다. 현정이가 엄마에게 쓴 편지를 읽고 난 후 우리는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나는 그동안 오직 나와 이이들만 바라보며 살아온 아내의 손을 꼭 잡아 줬다.

오늘 아침 출근을 하는 나의 마음은 오늘 하루 만이라도 아내의 마음을 돌아보며 공주처럼 모시고 싶었다.

고중일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성남문협 이사 ▲경기도신인문학상, 성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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