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으로 거듭난다 <1>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으로 거듭난다 <1>
  • 이동훈 기자
  • 승인 2011.10.20 19:50
  • 댓글 0
  • 전자신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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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등재 우선 추진대상 선정

남한산성은 백제 때 처음 성곽이 축조되고 조선시대에 와서 지리적 중요성이 인식돼 인조 때 산성을 새로 쌓았다.남한산성은 청나라 20만 대군과 40일 동안 항전한 역사의 현장이며 최근에는 수도권 남부의 손꼽히는 등산로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남한산성이 전면 복원되고 복원 과정에서는 통일신라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창고시설도 확인돼 남한산성이 지닌 역사성과 함께 다양한 성격의 문화유산의 가치가 새삼 부각되고 있다.특히 지난 2월 문화재청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 우선 추진 대상으로 선정됐다.

이에 경기신문은 경기문화재단과 300년 전 계획된 산성도시 남한산성의 업적을 재조명하고,2014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 사업 현황과 노력 과정을 총 7회에 걸쳐 짚어본다.<편집자주> 

 1. 국왕의 나들이 ‘行幸’과 그 유적들

조선후기에 국왕이 직접 나들이를 하고 행궁에서 여러 날 머문 대표적인 곳은 수원 화성행궁이었다. 순조 이후 역대 임금이 화성행궁에 머물며 여러 혜택을 베풀었다. 수원에 못지않게 숙종 이래 다섯 임금이 행궁에 머문 곳이 남한산성이었다. 수원 화성의 국왕 행차가 널리 알려진 데 비해 남한산성 행차는 잘 알려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에 남한산성의 국왕행차와 주요 시설물들은 어떤 것이 있었는 지 알아보자.

◇조선후기 남한산성의 국왕행차

임금의 행차를 행행(行幸)이라고 한다. 1779년 8월 남한행궁에 당도한 정조는 주변의 여러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광주부의 주민들에게 베풀어줄 혜택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행행이라는 것은 백성이 거가의 행림을 행복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거가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백성에게 미치는 은택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다 이것을 행복하게 여기는 것이다.”(‘정조실록’ 권8, 정조 3년 8월 3일)

행행하는 임금 입장에서는 모처럼의 나들이에 바깥 구경도 하고 백성들도 직접 만나 과거시험도 치르고 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펴는 기회로도 삼을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여주 효종릉의 능행은 모두 세차례였다. 숙종과 영조, 정조가 각각 한 차례 친제(親祭·국왕이 친림하여 행하는 제사)를 했다.

그때마다 남한산성에 오고 갈 때 들렀다. 철종과 고종은 헌릉과 인릉에 친제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남한행궁에 머물렀다.

남한행궁은 다섯 임금이 머문 곳으로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 다섯 임금이 머문 화성행궁과 같은 숫자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숙종 이후 역대 다섯 임금이 영릉과 인릉 친제를 하면서 남한행궁에 머물렀으며 머문 기간은 짧게는 2일, 길게는 4일이었다.

특히 정조는 가장 오래 머물면서 남한산성에서 여러 행사를 치렀다.

숙종이 영릉에 전배한 것은 숙종 14년(1688년) 2월 26일에서 30일 사이였다. 효종의 기일은 5월 4일이었지만 참배일은 여기에 구애받지 않고 왕이 임의로 능행시기를 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행궁에 머문 날은 출발일인 2월 26일과 영릉 전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29일 하룻밤을 묵었다. 남한행궁에서는 연도 읍 주민들의 세금을 감액해주는 조치를 취했다.

영조는 영조 6년(1730년) 2월 25일부터 29일까지 능행을 했으며 남한행궁에는 25일과 28일 머물렀다. 역시 세금감액의 혜택을 주었다.

정조는 가장 긴 기간 남한산성에 머문 임금이었다. 정조 2년(1779년) 8월 3일에 시작된 능행은 8일이 걸려 10일에야 왕이 궁으로 돌아왔다.

남한행궁에 유속한 날도 8월 3일 여주로 가는 길에 하루 머물고 돌아오면 7, 8, 9일 3일 머물렀다. 그 사이에 문무과거시험을 치르고 군사들의 조련인 성조식(城燥式)을 거행했으며 산성의 여러 시설들을 직접 살펴보았다.(‘정조실록’ 권8, 정조 3년 8월 3일)

철종은 즉위 13년(1862년) 9월 18일에 궁을 나서 당일에 헌릉과 인릉을 들르고 남한행궁에 머물러 이틀을 니내고 19일에 산성을 나서 궁으로 돌아갔으며 남한산성 인화관에서 문과 시험을 치르고 서장대에서 성조식을 거행했다.(‘승정원일기’ 철종 13년 9월 19일)

고종은 고종 4년(1867년) 9월 9일에 궁을 출발해서 첫날은 노량진 용양봉저정에서 유숙하고 헌릉과 인릉에 친제한 후 10일과 11일 남한행궁에 머물렀다. 그 사이 인화관에서 문과시험을 치르고 역시 성조식을 거행했다.(‘승정원일기’ 고종 4년 9월 11일)

임긍의 행차에는 왕의 비서격인 승지들이 반드시 따랐으며 영의정이나 좌의정, 중추부사 등 최고위 관료일부가 수행했다. 또한 육조 판거 가운데고 일부가 참여했다.

왕은 그때그때 지역의 현안 문제를 파악하고 정승이나 판서들에게 필요한 조치를 내려 백성들의 애로점을 해결하도록 지시했으며 연로에 특별히 임금의 이름으로 제사지낼 곳이 있으면 관리를 보내서 대신 제를 올리도록 했다.

또 남한산성에 머물 때는 서장대나 연무관을 비롯해 산성의 이곳 저곳을 말을 타거나 거마를 타고 직접 현장을 살폈다.

임금들이 남한산성에 들렀던 시기는 대부분 왕들이 한창 나이 때였다.

숙종 28세, 영조 37세, 정조 28세였으며 청종 32세, 고종이 16세 때였다. 궁궐 안에서만 지내던 임금이 먼 거리를 여행하는 일은 건강에 무리를 줄 수도 있는 일이어서 20∼30대 때가 아니면 좀처럼 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임금을 수행하는 영의정이나 육조 판서들의 경우는 나이가 간혹 60∼70대의 노령인 경우가 있었고 그 아래라 해도 50대 정도 됐다.

따라서 수행하는 신하들이 오히려 신체적으로 부담이 큰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조는 가끔씩 수행하던 영의정과 좌의정의 체력을 염려해 산성 탐방에는 따라오지 말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국왕행차의 주요 시설들

남한산성 내에는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산성의 성벽과 문루를 비롯해 연무관, 현절사, 온왕묘, 침과정, 지수당 등 조선시대 건물이 남아 있고 건물터로 행궁지와 인화관터, 관청터 등이 잘 보존되고 최근에는 행궁이 거의 모두 복원됐다.

국왕행차라는 관점에서 여러 시설 가운데 가장 중심은 행궁이다. 정조는 행궁에 들면서 수어사 서명응에게 병자호란 때 한군의 대포가 전각기둥을 때리자 인조가 후내전으로 거쳐를 옮겼다는 옛일을 상시시켰다.

행궁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시설은 연무관이다.

연무관은 정조 때까지는 각종 사료에 연병관으로 기록되다가 철종 행행시부터 연무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성조의식을 거행한 서장대는 군사훈련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며 서장대에서 신호포가 울리면 산성의 각 시설에서 응포가 울리고 사방에서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고 각종 색깔의 깃발이 휘날리는 화려한 군사 퍼레이드였다.

정조는 서장대에 올라 성조의식을 관람하고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고 철종과 고종도 서장대에 와서 주변 산세들을 살폈다.

인화관은 철종과 고종 때 과거 시험을 치룬 장소로 의미가 깊다. 문과시험만 치렀기때문에 과거 장소를 연무관이 아닌 인화관으로 택한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 시설 중 지수당은 정조가 각별하게 여겼던 장소다.

정조는 지수당 주변에 연못이 둘러싼 모습을 보고 군사들이 해갈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지수’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주역의 지수사(地水師) 괘의 의미는 장수가 군대를 통솔하는 데 있어서 덕망으로 이끌게 돼 길운임을 상징한 ‘지수사장인길지의’(地水師丈人吉之義)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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