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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한의세상만사]잘 마무리된 불행

 

아버지를 죽인 사람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말이있다.

그런 관계의 두 사람이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아들였다.

사람은 분명 꽃보다 아름답다.


스포츠 종목 가운데 ‘헝그리’라고 이름 붙이는 종목이 몇 있다. 대표적인 것이 복싱인데, 우리네 시대가 어두웠을 때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청춘이 출세(出世)를- 소위 쨍하고 해뜨자면- 이 길이 그래도 가장 수월했다.

김기수, 홍수환, 박종팔... 그들은 주먹 하나로 유명인으로, 자산가로 신분상의 격상(格上)을 한다. 그리고 괄시받고 서럽던 시절을 마감한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도취돼 가끔 불미스러운 소문도 뿌리지만 뒷골목 언저리를 배회했더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래서 시골 청년들은 무작정 상경 후 낮에는 짜장면 배달을 하고, 밤에는 권투도장에서 챔피언의 꿈을 키웠다.

흑백 TV 시대에 나오는 보편적 실화! 그러나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사그러진 사람이 더욱 많다. 김득구라고 있다. 30년 전 라스베거스에서 ‘라이트급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놓고 맨시니란 미국 선수와 경기를 벌이다 끝내 이국땅에서 목숨을 버린, 당시 스물일곱-한창 나이였다.

통산 전적이 19전 17승 1무 1패, 유일한 패배가 그날 비극의 시합이었다.

젖먹일 때 생부(生父)를 여의고 두 번에 걸친 어머니의 재가(再家), 이복형제와 불화, 주위의 손가락질과 벗어날 수 없었던 가난의 터널을 탈출하는 방법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4각의 링이었다. 어금니를 물고 싸웠다.

그때 그의 머리맡에 붙여둔 격언은 임전무퇴(臨戰無退)- 그에게는 스포츠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환호와 갈채는 관중들의 몫일 뿐, 그는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KILL OR KILLED)’라는 전쟁용어를 좌우명으로 삼고 결코 시합도중 뒷걸음치지 않았다.

속도 모르는 팬들은 저돌적인 자세에 열광하지만 전문가들은 그때부터 걱정했다. “저러다 큰일나지!”, 코치도 치고 빠지라고 충고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얻은 것이 동양챔피언! 단칸방을 벗어났고, 예쁜 아내도 얻었다. 세계 챔피언만 되면... 그 지긋지긋한 과거와 영원히 작별한다는 화려한 기대를 가지고 미국행을 했지만 패배가 예견되는 시합이었다.

난생 처음보는 많은 관중과 일방적인 응원 그리고 화려한 조명 감당할 수 있었을까?

결국 14회 연장에서 무릎을 꿇었지만, 다시 일어나려다 일격을 맞고.... 그는 마지막에 무엇을 떠올렸을까?

유복자(遺腹子)가 망망대해에 일엽편주(一葉片舟一) 저 험하고 거친파도를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되풀이되는 불행한 유전(遺傳)의 예감, 눈감기가 쉽지 않았으리....

김득구가 죽고난 후 불행의 파문(波紋)은 여러갈래로 퍼졌다. 우선 김득구의 어머니가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우리네 부모가 흔히들 가지는 ‘자식의 불행은 무조건 내탓’이라는 죄책감 때문이리... 그리고 그 경기에 심판을 봤던 사람도 우울증으로 끝내는 세상을 버린다. 시합을 중지시키지 못한 책임에 괴로워하다... 김득구의 아들과 맨시니가 미국에서 상봉(相逢)했다는 토픽을 들었다.

불구대천(不俱戴天)이란 말이 있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말이다. 복수(復讐)가 윤리적으로 용인되는 상황이다. 어쨌든 함부러, 그리고 자주 쓸 단어는 아니다. 그런 관계의 두사람이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불행이 아저씨 탓 만은 아닙니다. 이제 아저씨도 그날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도 됐습니다.” 펑펑 울면서 맨시니가 “이제 제가 비로소 편한 마음으로 여생을 마칠 수있겠네.” 돈문제로, 하잘것 없는 사랑 때문에 서로 불구대천이 많은데 하물며 자기 아버지를......

핏덩어리 유복자는 지금 당당한 치과의사! “아들아, 우리 권투선수는 치아가 형편없단다. 너가 좀 보살펴주렴...” 김득구가 후렴처럼 부탁했을것이다. “도대체 아들에게 해 준게 뭐 있다고” 염치없다고 할 지 몰라도 본시 부자지간에는 염치 없어도 큰 허물이 없는 법이다. 그리고 사람은 분명 꽂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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