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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레 미제라블’ 분노·저항만 아닌 화해·사랑까지

 

우리말로는 ‘불쌍한 사람들’ 정도로 옮겨야 할 <레 미제라블> 열풍이 거세다. 영화는 관객 500만을 눈앞에 두고 있다. 대한민국 인구의 10%가 본 셈이다. 실제 영화 관람이 가능한 인구를 고려하면 엄청난 숫자다. 19세기 프랑스 시인이자 소설가, 또 정치가였던 빅토르 위고의 이 작품이 우리에게 처음 선보인 것은 아니다. 일찍이 일본어 중역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버전의 번역은 물론이고, 영화와 연극, 뮤지컬 형식으로 여러 번 우리 앞에 등장했다. 그런데 갑작스런 신드롬의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과 같은 열풍의 시작은 사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센세이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호소력 있는 노래와 음악, 놀라운 무대 구성 등으로 세계의 공연계를 휩쓴 이 작품은 이 땅에서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비싼 관람료를 비롯해 상대적으로 한정된 관객만이 접할 수 있는 뮤지컬뿐이었다면 이 정도의 사회적 반향을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뮤지컬 형식을 성공적으로 변용시킨 영화, 즉 무비컬(movical) <레 미제라블>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처음부터 관객을 놀랍게 만드는 장엄한 세트, 혼신을 다한 배우들의 열연, 원작에서 이야기의 핵심적 요소만을 추출해낸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 등등, 이 영화의 미덕은 여러 가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 미제라블>의 사회적 반향을 영화 내적인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객석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도 자리를 뜨지 못하는 관객의 얼굴 표정은 뭔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후반부 시민군의 바리케이드 장면은 현재 우리 사회와 연관되어 새로운 해석을 낳고 있다. 즉 시민군의 분노와 좌절,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저항이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패자를 지지한 국민들의 붕괴된 심신에 힐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요소가 없지 않다. 시민군에 참여한 소년 가브리슈의 발언처럼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공화국을 세운 프랑스 국민은 왕을 단두대로 보낸 분노와 저항의 역사를 갖고 있다. 기득권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언제든 뒤집어엎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야말로 프랑스혁명이 보여준 가장 명확한 역사적 진실이다. 얼마 전 번역된, 레지스탕스 출신의 전직 프랑스 외교관 스테판 에셀의 저작 <참여하라>와 <분노하라>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히고 있다. 4·19와 5·18 그리고 6·29에서 보듯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 또한 이러한 분노와 저항의 전통을 심화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지난 대선에서 자신의 선택을 민주적이지 못한 정부에 대한 분오와 단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 영화의 시민군과 바리케이드에 자신들의 좌절을 투사했다는 게 꼭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레 미제라블>의 힐링 의미가 그러한 사회적 맥락만으로 한정될 수는 없다. 이 영화에서 다른 중요한 요소는 주인공 장발장이 보여주는 세계와의 화해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굶주리는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친 죄로 무려 19년이나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던 그가 미리엘 신부의 사랑을 통해 존재의 전회와 함께 인격의 대성숙을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빅토르 위고의 원작에서 백미에 해당한다. 이후 시장이 되어 타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자신의 실수로 구렁에 떨어져 비참하게 죽어간 팡틴의 딸 코제트를 돌봄으로써 타자에 책임을 다하는, 냉혈한 경찰 자베르까지 죽음의 위협에서 풀어줌으로써 용서를 실천하는 장발장은 인간존재의 아름다운 가능성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한 치유를 말하려면, 사회적 분노와 저항의 풍경 못지않게 장발장이 구현하고 있는 화해와 사랑의 극적 드라마를 지적해야만 한다.

위대한 작품은 사실 한두 가지로 요약할 수 없는 많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레 미제라블>은 그러한 복합적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고전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따듯한 연민과 함께, 보다 행복한 유토피아에 대한 열정적 동경. 19세기 낭만주의자 빅토르 위고가 21세기의 한국인에게 다가올 수 있었던 이유는 어느 누구가 아닌, 우리 모두의 염원을 그가 그려낸 덕분이다. 뮤지컬로든, 영화로든, 소설 원작으로든 부지런히 그 염원을 직접 확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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