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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칼럼]‘종북’딱지의 유치함에 대하여

 

플라톤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지극히 비판적이었다. 죄 없는 스승 소크라테스를 독살형에 처했기 때문일까.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청년들에게 ‘네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라’고 가르쳤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어진 가치를 신봉하지 말고, 먼저 인간의 덕성부터 갖추라는 가르침이다. 아테네 시민들 귀엔 그 소리가 껄끄럽기 짝이 없었던 모양이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아테네식 민주주의가 어떤 단점을 가지고 있는지 ‘선장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전문 항해술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무리들이 선장 자리가 탐나서, 갖은 술수와 선동을 다 동원해 선장을 몰아내면 그 배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은유는 민주주의의 중우성을 폭로하는 강력한 논거로 지금도 흔히 인용된다. 비유의 핵심은 선동과 술수에 놀아나는, ‘제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는 자들’의 유치함이다.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합리적인 사고와 토론이 멈춰 버리는 지점이 여럿 있다. 그 중 대표적이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북한’이다. 화기애애한 술자리에서도 ‘광기에 찬 미친 집단’ 이상 논의가 진전되면 싸움난다. 가령 북한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자고 하면 눈빛이 먼저 날아온다. “너 종북이지?”

엊그제 교사 이적단체 적발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이적의 증거로 적시된 사례다. 교실에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라는 슬로건을 붙여놓았다! 이 평범한 표어가 왜 문제일까? 입시 위주 한국교육 현실에 딱 들어맞는 말 아닌가?

문제는 이게 북한의 전 지도자가 고안해낸 구호라는 데 있다. 그걸 갖다 썼으니 꼼짝 못할 이적단체라는 논리 아닌 논리다. 물론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고 증거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만, 북에서 쓰는 말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에서는 이적행위가 된다.

(참고로, 나는 그 말을 누가 했건 ‘내일을 위한 오늘에 지극히 비판적인 사람이다. 나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즉 오늘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오늘주의자’다. 이런 구차한 변명을 해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 그래도 나는 ‘종북’ 딱지가 무섭다. 아니, 귀찮다.)

‘북한’에 관해서는 사실(fact) 확인도, 맥락 인식도, 거시적 안목도 제 스스로 찾아보고 판단해서 제시하면 자칫 큰일 난다. 공식 견해에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종북’ 소리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합리적 의심이 설 자리가 없다. 북한을 전공한 전문가조차 그렇다.

‘빨갱이’와 ‘종북’은 태생이 같지만 ‘종북’의 외연이 훨씬 넓다. 예전에도 정치적 반대파를 짓누르기 위해 ‘빨갱이’로 몰아붙이긴 했지만 ‘종북’만큼 널리 활용되진 않았다. 지금은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해도 ‘종북’, 탈원전을 외쳐도 ‘종북’, 철탑 노동자를 함께 걱정 좀 하자고 해도 ‘종북’이다.

상식적 비판도 위험하다. 무기업자 로비스트 전력자를 국방장관에 앉혀도 되나 따져도 ‘종북’, CIA 관련자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이 돼도 괜찮은가 물어도 ‘종북’, 국정원의 국내 정치 공작을 대북심리전이라 우기는 게 말이 되냐고 해도 ‘종북’ 딱지가 돌아오기 일쑤다. ‘종북’ 딱지엔 이제 주술적 힘마저 붙었다. ‘우리 편이 아니면 다 ‘종북’이다! ‘종북’에게는 증거도 논리도 필요 없다!’ 그러나 이래서는 진짜 ‘종북’을 걸러내는 기능도 제 구실 못한다.

제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을 선동하는 데 혈안이 된 자들에 의해 확대재생산 중인 이 시대착오적 상황이 언제쯤 끝날까? 끝나기는 할까? 더 민주적인 정치, 더 민주적인 자치, 더 민주적인 교육, 더 민주적인 삶을 향한 주장을 원천봉쇄하는 이 어이없는 봉인을 제거하기가 왜 그리 어려운 걸까?

한국 사회가 이처럼 유치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못 배웠기 때문은 분명 아닐 터이다. 외려 너무 배워서 탈이고, 잘못 배워서 문제다. “요새 사람들이 어디 못 배워서 세상이 이리 시끄럽나. 잘 배워야 되(돼). 몸으로 배워야 하는 거야. 내가 야학에서 가갸거겨 배우다 기역을 못 얹어서 글을 못 배웠지만 세상 이치는 좀 알어.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뭘 알까 싶어도 죽을 날이 가까우면 보이거든.” 수원에서 발행되는 골목잡지 <사이다> 지난해 가을호에서 읽은 9순 할머니 말씀이다. 한국 사회가 성숙하려면 너나없이 잘 새겨들어야 할 지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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