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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칼럼]‘장관 없는 정부’ 일주일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Juse Saramago)는 여든두 살 되던 2004년 소설 <눈 뜬 자들의 도시>를 발표했다. 10년 전 <눈 먼 자들의 도시>의 속편이다. 소설 무대는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 이유 없이 눈이 멀어 아비규환을 경험했고, 국가의 무능을 절감한 시민들이 일상을 되찾은 다음에 벌어지는 일이 줄거리다.

리스본 지방선거가 실시된다. 기록적인 투표율. 그러나 개표 결과 거의 대부분이 백지투표다. 지방정부 구성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당황한 중앙정부는 재선거를 치르기로 한다. 재선거 투표율도 매우 높다. 하지만 역시 백지투표가 절대 다수다. 중앙정부는 몰래 수도에서 철수하기로 한다. 무정부상태가 야기되면 리스본 시민들이 땅을 치고 후회하면서 굴복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중앙정부는 계엄을 선포한 뒤 야반도주한다. 수도 주위는 군인들로 철통 경계를 세웠다. 행여 다른 지역으로부터 지원이 이뤄져 시민들이 잘 버틸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웬걸. 중앙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리스본 시민들은 태평하게 일상적 삶을 이어간다. 정부가 없어서 생기는 불편은 오히려 상부상조로 해결하면서, 이전보다 더욱 행복한 모습으로.

사라마구는 독특한 상상력과 기법으로 ‘국가의 외부’를 그려 나간다. 국가가 없으면 인간은 단 하루도 살지 못할 것이라는, 근거가 확실치 않은 신념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린다.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이 취임한 지 일주일이 됐다. 그러나 여전히 ‘장관 없는 정부’다. 청문회를 통과한 장관 지명자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정부조직법 개정이 늦어지면서 내정 장관은 존재하는데 전혀 구실을 못하는 부처도 생겼다.

일부 언론은 이를 일러 ‘무정부상태’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이 정말 무정부상태인가? 내 보기에 국민들은 별 탈 없이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눈 뜬 자들의 도시>처럼 서로 도우면서 더 행복해진 것 같지는 않으나, 더 나빠진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상당수의 국민은 차라리 어떤 장관들은 취임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도덕성, 공직윤리, 전문성이 의심되는 내정자가 여럿 있다. 장삼이사는 잘 저지르지 않는 파렴치한 행위를 한 후보들도 있다. 도덕성에서는 ‘빵점’이 아니라 마이너스 점수를 줘도 시원찮아 보이는 이들이 너무 많다. 이런 장관들이 취임해서 ‘무정부상태’를 극복하면 나라 좋아질까? 새 대통령은 국민의 소리를 안 듣는 건가, 못 듣는 건가?

장관 취임이 늦어지는 이유는 청문회도 청문회지만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국회통과가 늦어진 탓이다. 핵심은 일부 방송 업무의 미래부 이관이다. 새누리당은 이관이 대통령의 국정철학이라 양보 못한다 하고, 야당은 방송 장악 의도라며 한사코 반대다.

MB 정부 방송장악의 심벌 MBC가 지난 2월2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부의 방송 장악이 우려된다’는 야당 주장에 공감한다는 응답이 46.6%로, 공감하지 않는다 32.9%보다 훨씬 높다. ‘방송통신 융합가치를 확대한다’는 정부여당 주장에 공감한다는 응답이 36.7%, 공감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36.2%로 엇비슷하다.

야당이든 여당이든 정당은 당연히 정략적이다. 여당은 정략을 떠나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데 야당은 정략만 추구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이번 사안도 정략 대 정략이 맞부딪치는 것이지, 국정철학과 정략이 맞선 게 아니다.

거꾸로, 방송장악 음모 대 민주주의 원칙 또한 편향적이다. 양쪽 모두 정략과 철학/원칙이 혼합돼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우리만 옳다’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재삼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 답답하다.)

새 정부의 지난 주말 움직임을 보면 ‘장관 없는 정부’가 매우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눈이 멀어 본 경험이 없는 우리 국민들은 ‘무정부상태’가 지속되는 걸 괜스레 불안해한다. 사실, 때때로 ‘국가의 외부’를 상상해 보는 게 외려 국가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사족이지만, ‘눈 뜬’ 리스본 시민을 굴복시키려던 소설 속 정부는 뜻대로 안 되자 자작극 테러 등 온갖 비열한 짓을 저지른다. 그러나 끝끝내 시민들의 마음을 되돌리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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