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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칼럼]전쟁에 반대한다

 

자고로 전쟁을 좋아하는 자들은 세 부류다. 첫째 지독한 ‘근시’인 한 줌의 정치인, 둘째 전쟁=떼돈인 죽음의 장사꾼들, 셋째 아수라장에서 기회를 잡으려는 부랑자들. 이들 외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이들 세 부류가 의기투합한다고 전쟁이 발발하지는 않는다. 이들에게는 적이 필요하다. 적은 발명될 수도 있다. 일단 적이 설정되면, 적은 절대악의 화신으로, 끊임없는 증오와 적개심만 합당한 대상으로 확대재생산된다. 위의 세 부류는 정의 혹은 애국심으로 포장된 복수심, 맹목적인 정념을 부추긴다.

서구인들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학살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국심과 정의감으로 위장된 세 부류의 부추김을 따라 2차 세계대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쟁=야만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는 했지만, 인류는 여전히 망각과 반성 사이를 왕복하고 있는 듯하다. 평시에는 전쟁=야만이라고 믿고 살다가도, 어떤 상황에서는 ‘전쟁은 평화’라는 정신착란적 구호(조지 오웰 <1984>)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클라우제비츠가 갈파했듯이 전쟁은 비즈니스다. 따라서 무기장수들이 전쟁 기다리기를 춘향이 몽룡 기다리듯 한다는 건 입 아픈 소리다. “사회적으로 승인 받은 지독한 근시 정치인 한 줌”은 20세기 전쟁 연구의 대가 가브리엘 콜코의 표현이다. 이들에게는 전쟁이 몰고 올 자기 조국과 동포의 가공할 피해보다는 당장의 정치적 득실이 더 중요하다. 부랑자들 역시 자기 자신이 파괴된다는 것조차 망각할 정도로 무너진 인간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에 합의한 미·북·중 대표는 해괴한 결정을 내린다. 합의한 순간이 아니라 12시간 후 협정이 발효된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 시간 안에 한 뼘이라도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남북 병사들을 개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바로 한 줌의 정치인과 지휘관들이다. 당시의 지옥도는 영화 <고지전>에 잘 그려져 있다.

그래도 한국전쟁 때는 양측의 병사들만 투입됐지만, 21세기 전쟁은 양상이 한결 심각하다. 만약 같은 결정이 21세기에 내려진다면 얼마나 많은 어린이와 여성이 죽어나갈지 모른다. 양쪽은 모든 화력과 공군력을 동원하여 점령하고 싶은 곳을 맹폭격, 맹포격부터 할 테니까. 21세기의 전장은 주권 대 주권, 군인 대 군인이 맞부딪치는 근대의 전장이 더 이상 아니다.

현대의 전쟁은 정확히 말해 민간 인질극이다. 이 글의 제목을 빌려온 책을 쓴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2차 대전 당시 공군 조종사였다. 그의 임무는 목표지점에 가서 폭탄 투하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눈이 달리지 않은 포탄이 얼마나 많은 민간인을 사상하는지 당시에는 실감하지 못했노라고 그는 고백한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무기들은 눈과 귀가 전혀 없다.

영국 학자 매리 캘도어는 <새로운 전쟁과 낡은 전쟁>에서 현대전의 경우 작은 도시 하나를 차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공격 측의 화력이 우세하다고 해도 방어 측의 화력도 만만치 않다. 양측은 서로를 향해 폭탄을 퍼부어댄다. 죽어나가는 것은 다시 한 번 민간인들이다. 리비아에서, 시리아에서 많이 본 광경 아닌가.

캘도어는 흥미로운 점을 지적한다. 전쟁의 양상이 20세기 후반부터 민간 인질극 형태로 근본적으로 바뀌었는데도, 21세기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들이나 전략을 수립하는 참모들, 그리고 주요 결정을 내리는 정치인들은 클라우제비츠 식의 근대적 전쟁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렇게 배웠으니까. 전쟁은 그들이 시작하고 진행시키지만, 전쟁이 커질수록 가장 큰 불행은 점점 더 민간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하느님 맙소사!

절대악 혹은 짐승인 적이 도발해오면 어떻게 하냐고? 물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확실히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적이 도발했으니까 나도 똑같이 보복하겠다는 건 나 역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절대악 혹은 짐승이 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전쟁이 일단 시작되면 어느 쪽이 정의로운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짐승 대 짐승의 폭력만 난무할 것이다. 같은 짐승이 되기 전에 전쟁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일찍이 존 레논은 노래했다. 평화에게 (끝까지) 기회를 제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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