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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시론]프란치스코 교황

 

운전사도 없고, 아니, 자동차도 없어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추기경이, 부엌에 들어가 요리를 직접 해 먹는 추기경이, 어떤 축구팀의 광팬인 추기경이,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가 교황이 되었다. 왠지 친근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그가 높디높은 추기경이었다는 것도 신기한데, 그가 더 높은 교황이 된 것이다.

그 교황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그렇게 올곧게 살아온 추기경이 이름을 선택한다는 것은 의례도 아니고, 멋도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의 이름은 불씨이며 지향성이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코는 누구일까?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로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변화시키려는 용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던 그 성자, 그가 프란치스코다. 그는 교회권력이 아니었으나 교회권력과 대립각을 세워 투쟁한 인물도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과 살았으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지 않은 사람을 욕하지도 않았다. 절대적으로 하느님을 믿었으나 자기가 본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하느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며 신에 대한 무지(無知)를 고백했다. 그 고백으로 그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떠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 그 고백은 무신론자의 ‘주장’이 아니라 무한한 신을 유한한 개념 속에 가둘 수 없음을 아는 자의 겸손이었던 것이다.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로 다녀도 별처럼 빛났던 그 성자, 프란치스코를 사랑했기에 그는 대교구장에 오른 뒤에도 관저에 살지 않고 작은 아파트에 살았나 보다. 올해 대박이 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의 미리엘 신부처럼. 뮤지컬로 만들어진 <레미제라블>은 음악에 빠져들기는 좋았으나 가난의 고통으로 이지러진 사람들이 중심이어서 미리엘의 성격을 세심하게 만들어내지 못한 게 내겐 아쉬웠었다.

무엇보다도 내겐 미리엘이 그저 선하기만 한 신부인 게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원작이나, 원작에 충실한 장 콕도의 <레미제라블>은 미리엘 신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관저는 가난한 자를 위해 내주고 작은 집에 화단을 가꾸며 사는 미리엘은 그저 인심 좋은 이웃집 아저씨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검소의 힘을 알며 사람의 중심을 볼 줄 아는 사람 중의 사람이었다. 나는 귀족이 와도, 걸인이 와도, 한결같이 검소한 식탁을 흔연하게 나누는 그가 참 좋았다. 그와 함께라면 거친 빵과 따뜻한 수프도 신이 내린 훈훈한 밥상이 되었다. 그 밥상으로 사람대접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암담한 죄수 장발장이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의도 없이 따뜻한 한 끼의 밥상은 내 속의 신성이 반응하는 위대한 밥상이다. 나는 그것이 평등하고 훈훈한 밥상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직접 요리하는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는 바로 그 밥상의 힘을 알고 있는 사제인 것이 아닐까. 연일 주목을 받고 있는 교황의 행보를 보면 진짜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들이다.

교황은 교황을 뽑기 위해 묵었던 호텔에서 직접 짐을 싸 체크아웃하며 손수 숙박비를 계산하기도 하고, 예고 없이 성안나 성당에 나타나 즉석 강론을 펼치기도 했단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악수하고 인사하는가 하면, 즉위 첫날부터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강론해 참회하지 않은 교회는 인심 좋은 NGO에 불과하다며 신앙의 힘을 강조하기도 했단다.

진리의 힘은 권위가 아닌 소통과 공감임을 보여준 교황, 추기경 시절 그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교황청에 가서 기도하기 위해 여행경비를 쓰지 말고 그 경비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쓰라고 했다지만 나는 그가 있는 교황청에 가보고 싶다. 그가 집전하는 미사를 보고 싶다. 특별한 말씀을 듣고 싶어서라기보다 단순하게 살아온 그를 보고 싶은 것이다. 단순한 사람이 영적인 사람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다지 않나. 나는 영적이어서 단순해진 자의 온화한 얼굴과 몸짓을 마음에 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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