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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칼럼]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은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다. 본인은 강력하게 부인할지 모르겠다. 운이 아니라 실력이라고. 하지만 그는 우선 관운을 타고났다. 이명박 정부 첫 행정안전부 장관이 된 것부터가 그렇다. 행정고시 출신이고, 서울시 공무원으로서 잔뼈가 굵었으며, 서울시 부시장까지 했으니 행안부 장관 자격은 충분하다. 하지만 행시 출신 고위 공무원이라고 누구나 장관되진 않는다.

진짜 운은 2009년 국정원장 발탁이다. 행정공무원 출신이라고 정보기관 수장 못하란 법은 없으나 어째 격이 잘 맞지 않았다. 당시엔 남모르는 비밀 정보활동 경력이라도 있는가 싶었다. 진위야 알 길 없으되 MB는 어쨌든 그를 국정원장에 임명했다. 대통령의 복심을 가장 잘 헤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능력보다 충성심을 훨씬 높이 사는 전통은 이승만 대통령 이래 유구하다.

국장원장 재직 중 사건이 적지 않았으나 대충 넘어 갔다. 특히 천안함, 연평도 등 어마어마한 대형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대북 정보 수집과 분석에 큰 허점이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국정원장은 건재했다. 북의 핵과 미사일 관련 동향도 꼭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허둥지둥하는 모습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국정원장 책임은 묻지 않았다. 우리 같은 서민들은 모르는, 알아서도 안 되고, 깊이 알면 다치는 고급 정보는 다 공유되었기 때문일까. 하여튼 그는 운 좋게 끝까지 MB 곁을 지켰다.

막판에 결정적인 사고가 하나 터졌다. 쥐도 새도 모르게 은밀히 활동해야 하는 ‘대북심리전단’ 단원 하나가 대선 판에서 얼쩡거리다 들켰다. 대선이 끝나고 이 건도 유야무야 운 좋게 묻히는가 싶었는데, 대북심리전단의 활동이 원 원장의 지시로 이루어졌다는 결정적 증거가 나왔다. ‘원장님 말씀’에 따라 ‘종북 세력이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국정원이 벌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말씀’이 그대로 집행되었다는 증거도 제시됐다. 직접적 표현은 없으나 보도된 ‘원장님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MB반대=종북’이다.

좀 납득이 안 되는 점은 ‘원장님 말씀’이 어떻게 몇 년간 국정원 내에서 절대시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말씀’에 죽고 사는 건 종교집단이거나 조폭이거나 북한 체제 아닌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다루는 최고 엘리트 조직이 정말 이렇게 움직인 게 맞나? 어쨌거나 이 문제는 묵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정보기관이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뿌리부터 위협한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사찰과 공작을 벌인 일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의 진짜 운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 지난 주말 직전만 해도 운은 그의 편이었다. 사찰과 공작의 대상이었던 단체들이 줄소송을 제기하고, 그에게 헌법 상 내란죄 적용도 가능하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지상파 방송들은 단 한 꼭지 단신으로도 처리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는 연일 격렬한 성토와 토론이 이어지는데도 메이저 언론들은 애써 외면했다. 시시껄렁한 가십 하나에도 벌떼처럼 달려드는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사안에 대한 판단이 얼마든지 다를 수는 있지만 이게 그렇게 무시되어도 좋은 일인가? 그러니 그의 운이랄 수밖에.

연일 대형 사건이 터져준 것도 그의 복이라면 복이었다. 방송사와 은행을 대상으로 한 대형 해킹이 벌어지더니, 한 방에 훅 간 사람들 소식도 줄줄이 이어졌다. 수년 간 인터넷 스포츠도박을 벌였다는 연예인, 20대 여성과 성희롱 메시지를 주고받았다는 유명한 인권운동가, 건설업자로부터 성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에 휩싸여 사직한 법무차관. 이들 사안도 중요하다. 특히 법무차관 성접대 건은 업자와 권력의 유착이 이젠 어떤 막장까지 갔나를 드러내주는 심각한 사건이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해킹도 이번에는 꼭 자초지종을 명쾌하게 밝혀내야 한다. 사실 이런 유형의 사이버 테러를 막으려면 국정원이 ‘원장님 말씀’에 따라 대북심리전 놀음 따위나 벌일 틈이 없다.

그런데, 그의 24일 비밀출국 작전이 탄로 나면서 검찰이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다고 한다. 이제 그의 운이 다한 걸까? 아니면 불사조처럼 빠져나갈까? 대한민국이 정말 자유민주주의국가라면, 그가 아무리 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잘잘못을 정확히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 그거 못하면 국정원은 중앙정보부로 퇴행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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