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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호칭, 권위로부터 평등으로

 

두어 주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한 여학생이 부지런히 와서 문을 두드린다. 매년 5월 중순이면 있는 스승의 날 기념식 때문이다. “선생님, 이제 식을 시작한대요. 가세요! 아니 교수님이지. 죄송해요, 교수님!” 당황스럽지만 낯선 경험은 아니어서 나는 웃으며 알려준다. “교수는 직위고, 나는 먼저 배운 사람으로서 선생이 맞아.” 학생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한다. “몰랐어요. 근데 선생님보다 교수님이 더 좋은 거 아니에요?” 할 말이 없다. 학생을 탓할 수도 없다. 모르기 때문에 배우는 게 학생의 일 아닌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의 호칭에는 권위주의시대의 유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초중등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보다, 대학교육에 종사하는 교수가 더 위라는 생각 같은 것이 그 예다. 물론 교수가 좀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전문가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다른 교육기관에서 차지하고 있는 직위의 표현이지, 먼저 배운 사람으로서 선생이라는 것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먼저 배웠기에 앞에서 알려주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 그런 점에서 선생이란 용어가 참 좋다. 나에게는 초중등 교육에 종사하는 두 분의 계수씨와 친형님 한 분이 있다. 우리는 모두 선생이다.

갑을관계의 표현

그런데 익명의 사회에 나서는 순간 나에 대한 호칭은 또 바뀐다. 대부분은 사장님이다. 나는 회사를 경험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 그럼에도 사장님이라고 불린다. 불편하다. 사장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이름에 걸맞은 정체성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상에 무슨 사장이 그렇게 많은지, 갑남을녀 우수마발이 다 사장님이다. 그러면 회사에 남아 일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사장이 직원보다 꼭 나을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사장님이라는 호칭 또한 권위주의의 한 표현이다. 갑을관계를 명백히 하려는 사회적 무의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러니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누구나 위에서 군림하는 갑이 되고 싶으니 말이다. 우리의 사회적 관계에 긴장이 증폭되는 커다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군림하지 않으면 군림 당하는 권위주의의 폭력이 과도한 사회적 긴장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비행기의 라면 사건이나, 개그콘서트의 정 여사와 브라우니, 프랜차이즈 회사의 본사와 가맹점주, 진상 손님과 감정 노동자의 관계가 모두 이 긴장의 표출이다.

프랑스에서는 행정기관의 일선 창구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부분 ‘마담’이라는 경칭을 쓴다. 보통 일선 창구 담당자들은 나이도 많지 않고, 직위도 높지 않다. 그럼에도 경칭을 쓰는 것은 그들이 서비스 제공자들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고 싶으면, 그 제공자를 존중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랜 민주주의 역사를 통해 일상에서의 평등 관계야말로 사회적 긴장을 줄이는 지혜라는 점을 깨닫고 실천하고 있다. 이 정신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실 한국사회의 권위주의 청산은 정치사회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다. 요즘 한국경제는 저성장의 덫에 빠져 있다. 자원이 없고 시장이 작은 나라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제조업 중심의 경직된 구조로부터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이 균형을 이룬 유연한 체질로의 변화가 요구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외국인 진료를 포함한 의료 수출, 국경 없는 돈이 모이는 금융 허브, IT혁명의 소프트웨어 산업, 관광 및 레저 산업, 무엇보다도 창의적 지식산업의 육성 등이 절실하다. 그런데 갑을관계의 권위주의 의식과 사농공상의 봉건적 전통까지 더해 서비스 제공자를 을로 보는 사회적 시선이야말로 이러한 서비스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서비스산업 육성 경제적 과제

그것은 우리의 대학도 마찬가지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교수가 아니라, 먼저 배운 사람으로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선생이라는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 지식을 독점한 권위적 기관이 아닌 창의적 지식산업의 중추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걱정이다. 나부터라도 학생들이 스스럼없이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탈권위주의적 인간이 되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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