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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오만과 치욕

 

기억은 1999년 터키 이스탄불로 올라간다.

죽마고우와 달랑 배낭 하나 메고 터키 여행을 떠났다. 이유는 간단하다. 친형 보다 더 친한 허태수 목사의 권유였다. “좁은 한국에서 놀지 말고 큰 세상을 보고오라”는 특명이었다. 주저 없이 떠났다. 콧수염과 담배를 흩날리며 거리낌 없이 그들은 물었다. “너, 어디서 왔니?” “중국? 일본?” “아니, 대한민국에서 왔어.” 그 대답을 듣자 그 콧수염 사내들은 성큼성큼 왕복 4차 도로를 건너 왔다. 두려웠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잠시. 그 거친 입에서 터진 목소리는 하나, “내 친구들(My friends)”이었다. 이어진 포옹. 그 따뜻함을 잊을 수 없다. 하물며 타국에서 만난 한국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랴. 이스탄불에서 여행사를 하던 후배와 금방 호형호제(呼兄呼弟)가 됐다. 한국 식당에서, 또 그 친구의 집에서, 우리는 ‘라크’로 불리는 터키술을 양갈비를 안주로 대취하는 날들이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후배가 제안했다. “노래방 가실래요?” “여기도 있어?” “그럼요. 한국사람 사는데 노래방 없는 곳이 있나요?” 그래서 갔다. 작지만 비교적 깨끗한 규모의 홀 형식 노래방이었다. 기분 좋게 맥주를 나누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순간, 갑자기 주인장이 바빠졌다. 손님들 테이블로 가더니 한마디씩 하고, 이어 손님들은 나갔다. 마침내 우리 테이블. “저기…. 대사관에서 영사님과 직원들이 오신다는데 자리를 비워주시면 안될까요?” 의아했다. 술기운을 빌려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궁여지책으로 주인장은 “빨리 끝내주시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손님맞이 준비를 했다. 잠시 후 여러분들이 오셨다. 그들은 당당했으며 안방처럼 술청과 노래를 오갔다. 참 가관이었다. 위장보다 마음이 더 쓰렸다. 그 후배 역시 대사관 사람들에게 좋은 마음은 아니었다. 봉사보다 군림하려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늘 그랬다. 우리나라 대사관 관계자들은. 한동안은 재외동포들의 오해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현지에서 느낀 것은 그렇지 않았다. 여흥이 계속됐고, 화장실에서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을 만났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슬쩍 말을 흘렸다.

다시 돌아온 홀. 일행끼리 귓속말이 이어졌고,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파했다. 주인장은 영문도 모르고 왜 일찍 가시냐고 아쉬워했다. “저렇게 급하게 가실 분들이 아닌데…”라는 주인장의 아쉬움이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공기업 가운데 하나인 한국수력원자력 직원들의 화려한(?) 외도를 보면서 왜 그 일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오랜 세월 공(公)이라는 글자에 묻어있던 오만을 보았기 때문일까. 공복(公僕)이라는 기대는 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최소한 공인(公人)이기를 바랐던 알량한 기대 때문일까. 세상에 공개된 이야기지만 ‘한수원 외도’를 들춰보자. 원전 비리로 국민들의 대대적인 지탄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더욱 씁쓸하다.

자체감사에서 지난해에만 각종 비위행위로 84명이 징계를 받았다. 올해는 지난 8월까지 총 49명이 징계 대상이 됐다. 비위 행태는 참 가관이다. 향응·금품수수는 기본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국민의 녹을 먹는 공기업 직원으로서 자격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개탄했다.

UAE 원전 수주로 현지에 파견된 한 직원은 만취운전을 하다 적발돼 업무현장에 장기간 출입정지를 당했단다. 인터내셔널 X망신이다. 또 있다. 직원들이 단체로 필로폰을 투약하다 적발됐다. 대단하시다.

내부 교육생에게 평가문제를 유출해 합격을 도운 뒤 포상금을 나눠 갖고 부모 회갑이라고 속인 뒤 12일간 경조휴가를 다녀온 직원도 있다.

그래도 처벌은 솜방망이다. ‘아름다운(?) 제 식구 감싸기’다. 이래서 나라꼴이 되겠는가, 묻고 싶지도 않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을 장악했던 노론(老論)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최소한의 상도의(商道義)는 지켰던 것으로 역사는 기록한다.

하기야 어디 그들만의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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