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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한국인, 국가가치 공유하는 사람이어야

 

너무 빠르게 바뀌는 세상이라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요즘 형편이다. 불과 두어 달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러시아 소치에 붙들려 있었다. 동계 올림픽 종목들이 그다지 인기 있는 것은 아닌 데다, 국제경기에서만 지나치게 흥분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내키지 않았지만, 다음 개최지가 평창이라서 관심을 안 둘 수 없었다. 누가 뭐라 해도 영웅은 김연아였다. 이미 생애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도 다시 도전하는 그 스포츠 정신은 결과와 상관없이 놀랍고 찬탄할만한 것이었다. 거기에 최다출전 기록의 이규혁이나, 쇼트트랙 어린 선수들의 투지를 더하면, 이제 대한민국은 경제만이 아니라 동계스포츠에서도 강소국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중요한 사건이 하나 불거졌다. 다름 아닌 러시아 쇼트트랙의 황제 ‘빅토르 안’, 즉 안현수 선수의 국적 문제였다. 그는 러시아 국가대표다. 이미 국적이 러시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의 입장은 애매했다. 그를 러시아인으로 선뜻 인정하지도 못 했고, 그렇다고 자발적으로 국적을 포기한 그를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 추켜세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빅토르 안이 우리 선수들을 여유 있게 제치며 최고의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줄 때마다, 우리 선수였다면 하는 아쉬움과, 왜 저런 선수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나 하는 분노가 복잡하게 얽혀서 현직 대통령까지 한 마디 거들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는 게다가 우리 현대사에서 미묘한 관계에 있는 국가다. 미국이나 캐나다 국적 취득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풍부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G8에 속해 있긴 하지만 우리보다 나은 선진국이라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러시아! 그런데 안현수는 러시아를 선택했고, 승리 뒤에 경기장에서 러시아 국기를 몸에 감고 트랙을 도는 모습을 주저하지 않고 보여주었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감격 어린 축하 메시지까지 더해져 TV 화면을 들여다보는 우리 국민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

나는 몇 해 전 미국 소설가 이창래의 서울대 강연에 초청받아 간 적이 있다. 강연의 문학적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영어 강연과 한국어 통역으로 이어진 강연에서 작가에게 질문을 던지던 학생들의 놀라운 영어 능력과 함께 나를 생각에 잠기도록 만든 것은, 이창래 자신이 ‘미국인’임을 밝힌 점이었다. 정확하게 그는 자신을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했다. 그 자리에 부러운 눈길로 앉아 있는 청중으로서는 그가 한국인이라고 말해주길 바랐는지 모른다. 나는 이창래가 의도적으로 그 점을 명확히 하고자 자신을 미국인이라고 밝혔다고 생각한다.

사실 당연하게도 그는 미국인이다. 다만 한국 핏줄을 가진 미국인일 뿐이다. 실제로 그는 한국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하며, 배우자 역시 한국인은 물론 한국계조차 아니다. 태어나기만 했을 뿐, 미국에서 성장하고 교육 받았으며, 명문 프린스턴 대학 문예창작학과의 소설 전공 교수로, 미국에 노벨문학상을 안겨줄 유력한 후보다. 몇 해 전, 미국 슈퍼볼의 영웅으로 떠들썩한 환대를 받은 하인즈 워드가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이창래는 한국인이 아니다. 이에 반해,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금발 거구의 인요한 교수는 이 땅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대한민국에서 보내고 있는 엄연한 한국인이다.

이 말은 한국인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더 이상 핏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단일민족이라는 허위의식이 있다. ‘단군신화’란 역사 속의 흥미 당기는 이야기일 뿐이며, 한국인은 북방계와 남방계의 여러 핏줄이 뒤섞여 형성됐다는 학문적 진실에도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는 깨지질 않는다. 그래서 이민자 가운데도 성공한 사람은 핏줄로 연결된 한국인임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다. 하지만 민족이란 역사의 우연이 만들어낸 가공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한국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잣대는 그가 대한민국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공유한다는 점, 그 한 가지뿐이다. 핏줄이 아닌 가치, 그게 바로 국적의 잣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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