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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성칼럼]이번엔 ‘국물도 없다’

 

요즘 같은 봄철이면 들로 산으로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놀던 때가 있었다. 서울에서도 신촌 변두리 노고산 밑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덕분이다. 지금은 서강대학교가 노고산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당시 그곳은 제법 모습을 갖춘 산, 내, 들이 있어서 나에겐 꽤나 훌륭한 놀이터 구실을 했다. 두세 살 많은 동네 형들을 비롯 어울리던 몇몇 또래들은 학교 파하기 무섭게 동네어귀에 모여 노고산으로 출정(?)하는 일이 거의 매일 이어질 때도 있었다. 무엇에 이끌렸는지 모르지만 무리에서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기를 쓰고 따라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막 피어나는 청춘의 발산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어스름저녁 귀가 시간이 되면 내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그 자리에서 형들은 결석자(?)를 막기 위해 으레 이런 말을 했다. ‘만약 내일 안 나오는 사람은 알아서 해. 한번이라도 빠지는 사람은 다음에 또 끼어달라고 해도 국물도 없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면 반기는 건 눈꼬리 올라간 엄마의 톤 높은 목소리다. ‘이놈에 자식 어디 갔다….’ ‘일찍 와서 숙제하고 예·복습하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니.’ ‘이번 한번만이다. 다음에 또 그랬단 봐라 국물도 없지.’ 그날 밤은 ‘내일 노고산에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이 국물 혹은 저 국물’ 하는 고민이 방 천장을 맴돌아 어린 마음에도 심란했던 기억이 있다.

‘국물도 없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많이 듣는 말이다. 어릴 땐 공포심을 갖고 들었던 내용처럼 형제들 중에 특히 형들이나 동네 꼬마 왈패들이 자기보다 어리거나 힘이 없는 애들을 기죽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한다. 이럴 땐 ‘이∼씨’ 하며 주먹이 동반되기 일쑤다. 그런가 하면 “…당신이 회전의자 돌리고 앉았으니까 뭘 우려먹을 건덕지라도 있을까 해서들 그렇게 드나드는 거죠? 그렇지만 일찌감치들 속 차리라고 그래요. 국물도 없으니까.” 박완서의 소설 <도시의 흉년>에 나오는 내용처럼 가당치도 않은 접근이나 모사를 꾸밀 때, 또는 어림없다는 뜻의 면막 주는 말로도 사용된다. 박완서의 또 다른 소설 <흑과부>에 나오는 “사모님 댁이니까 내가 큰맘 먹고 해드리지 딴 댁 같으면 국물도 없다고요. 장사를 하면 아무리 쉬엄쉬엄 놀면서 해도 하루 삼천원 벌이야 못할라구”라는 표현처럼 선심 쓸 때 빗대어 쓰기도 한다.

‘국물도 없다’는 말이 인정사정 안 봐준다는 뜻으로 풀이되는 것을 보며 우리 밥상에서 국물이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새삼스레 느끼게 해준다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국물이 없으면 밥을 먹기가 얼마나 어렵길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협박으로 통할 정도인가’라는 우문(愚問)도 함께하면서 말이다.

1960년대 중반 민중극단에 의해 초연됐고 최근에도 대학로에서 가끔 공연되는 이근삼의 ‘국물 있사옵니다’라는 희곡이 있다. 본성이 착한 청년의 세속적인 출세기를 다룬 작품이다. 당시 유행하던 ‘국물도 없다’는 말을 반어적으로 활용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욕망 충족을 위해 전력투구 하는 비정하고 동물적인 인간성을 다각도로 다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소심하고 어리숙한 젊은이로 등장한다. 이 젊은이가 출세 방법에 눈을 뜨자 무모할 정도로 과격해져 남을 이용하고 희생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는 냉혈한으로 변한다. 그리곤 어떤 경우에도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취해야 한다는 것, 양심적인 갈등은 백해무익하다는 것 등을 자신의 도덕적인 규범과 생활신조로 삼는다는 내용이다.

‘국물 있사옵니다’를 외치며 발 벗고 뛰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특히 6·4지방선거를 앞두고 더하다.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고 지역에 이바지하려는 사람들도 많지만 정치라는 허울을 내세우며 자신의 명예와 부를 축적하려는 사람들도 넘쳐나기 때문이다. 어쭙잖은 생각과 공약을 가지고 유권자들을 유혹해 자신을 인정받으려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번엔 ‘국물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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