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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여름 쓰레기 치우기

 

무기력한 이 여름의 끝자락에 집 정리를 했다. 간단하게 분위기나 바꿀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일을 벌여 놓으니까 처음 생각과는 달리 쉬 마무리가 안 되었다. 거실의 소파나 치우려고 시작한 일은 책장 정리, 옷장 정리, 창고 정리로 이어지며 사나흘씩 계속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는 용도를 다한 쓸모없는 물건들이 집안 구석구석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쌓아놓은 것들이 대부분 쓰레기라니. 정리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눈앞의 살림살이들을 살펴 보니 책이며 옷가지, 그 밖의 소소한 물건들이 버릴 것 투성이다. 씁쓸하다. 돈 주고 산 물건을 별로 사용도 하지 않은 채 돈을 주고 버린다.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 투입되는 돈과 에너지는 점점 늘어나고 자원은 고갈되는 현실이다. 우리가 쓰레기 문명의 정점에 서 있음을 절감하는 순간이다. 쓰레기의 양을 줄여야 지구가 쓰레기에 묻히지 않을 텐데 ‘버릴 것인가? 버리지 말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너무 많이 생산하고,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다. 문화예술 판에도 너무 많은 쓰레기들이 양산되고 있다.

우리 집에도 한 번도 듣지 않은 음반들이 수두룩하다. 집 밖으로만 나가면 온통 축제다. 길거리에서는 눈만 돌리면 예술작품들 천지다. 아, 온 세상이 예술이요 문화세계인데 이걸 치우고 시중드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다. 거기에다 또 한 달에 한 번 ‘문화가 있는 날’이라며 이걸 준비한다고 고생이 많다.

쓰레기를 치우다가 건진 물건도 있다. 책장 구석에 박혀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던 대학시절 읽던 시집 몇 권이다. 빛바래고 낡은 책장을 넘기며 모처럼 푸근한 한가로움을 누렸다.

아마도 이즈음이었을 것 같다. 독일의 시인 릴케는 ‘가을날’이라는 시에서 ‘지난 여름은 위대했습니다’라고 노래했다. 풍요로운 결실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은혜로운 햇살을 며칠 더 허락해 달라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현승의 시 ‘가을의 기도’ 중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라는 구절도 다시 눈에 들어온다. 독문학과를 다니던 청년시절에 이런 시들을 읽었구나. 시인들의 기도는 조용하고 간결하다. 그런데 힘이 있다.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쓰레기 사이에서 이런 보물을 발견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으니 다행이다.

어제 저녁에는 우리 집 거실에 귀뚜라미 한 마리가 날아들어 왔다. 낮 더위는 아직 물러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매미소리는 잦아들었고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집안 정리정돈을 하다가 귀뚜라미를 보게 되니 어수선하고 힘들었던 여름날의 뒷자리가 비로소 정리되는 느낌이다. 한낮의 번잡한 일상과 소음에서 벗어나 듣는 늦은 밤의 귀뚜라미 울음소리 덕에 차분하고 고즈넉한 가을밤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다. 일상으로부터 한 걸음 조용히 물러나 자신의 가슴이 뛰는 소리, 숨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여유와 한가로움이 생긴다.

돌아보면 2014년 우리나라의 여름은 정말 위대하지 못했다. 여름 내내 사건과 사고가 이어지며 충격과 슬픔이 끊이질 않았고, 수습과정에서 야기된 무능력과 소통 부재는 사태를 갈등의 국면으로 치닫게 하고 있다. 소리만 요란한 생색내기,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대응, 그 나물의 그 밥인 대책들만 난무한 여름이었다. 지난여름의 쓰레기 같은 우리의 잘못된 관행과 문화 중에서 버려야 할 것은 제발 과감하게 청산했으면 좋겠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도는 쓰레기 같았던 대한민국 여름날을 비춘 오색찬란한 무지개였다. 눅눅해진 마음을 가을 햇살에 말리고 귀뚜라미 소리 들으며 홀로 조용히 기도한다.

2014년 대한민국의 여름은 아파서 위대했기를. 아무리 힘들었다고 해도 다가올 한가위처럼 우리 모두에게 여유와 마음의 풍요가 다시 찾아오기를. 화해와 용서가 가을 들판의 황금빛 물결처럼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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