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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위 찹쌀가루 뿌린 듯… 눈길마다 명작 갤러리

이한숙 작가의 감성여행기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

 

 

‘카이코우라’에서 ‘그레이마우스’로 이동
초원 양떼 등 어우러진 자연풍광에 매료

전국에 여행자 인프라 잘 구축돼 있어
뉴질랜드는 캠퍼밴 여행자들의 천국

숙소 인근 마트서 장엄한 일몰에 눈물


저녁이 돼서야 그레이마우스에 도착했고 일정표 상의 계획은 불가피하게 수정됐다. 일정이 밀릴 걸 예상하고 범퍼처럼 충격을 완화해줄 거점지로 퀸즈타운을 삼았다. 그곳에서의 자유일정을 좀 줄이면 지금의 일정을 계획대로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엔 좀 더 무리한 일정을 짰다. 북쪽의 넬슨과 아벨 타즈만 국립공원까지 넣어서 남섬 전체를 완주하려고 했다. 그러나 길 위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HS나 나 같은 사람만 일행에 있는 건 아니어서 아깝지만 북쪽을 과감히 날리고 서해안의 웨스트포인트도 날렸다.



 

 

 

카이코우라에서 루이스패스를 가로질러 그레이마우스에 도착할 때까지 변화무쌍한 풍경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높고 낮은 산과 우거진 숲과 자유분방하게 흐르는 빙하 개천과 갈대 분지와 푸른 초원과 또 그 초원 위의 양떼들, 다시 병풍처럼 그것들을 둘러싼 설산까지 다양한 풍경 속을 달렸다. 뉴질랜드는 각종 자연 명작을 한 데 모아놓은 갤러리 같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아직은 초장이다. 이미 같은 곳을 여행 해봤다는 사실이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 곳, 뉴질랜드는 머무는 휴양 여행보다는 풍광 속을 달리는 이런 로드 트립이 제격이다.

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차들은 쌩쌩 달리지 않았다. 가끔 눈에 보이는 사람들도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HS 역시 풍광을 즐기느라 속도를 내지 않았다. 뉴질랜드의 길은 참 정겹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린 곡선의 길이 대부분이다. 하나의 길이 접히고 또 다른 길이 얼굴을 내밀 때마다 다가왔다 사라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스레 우리네 인연이 생각났다. 오는 인연을 환영하고 가는 인연을 잡지 않는 것, 그것이 자연이 가르쳐주는 교훈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운전석 옆에 앉으면 전체 풍경을 보아서 좋고, 가운데 창가 자리에 앉으면 좀더 사물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 하얀 눈송이처럼 점점이 작아지며 멀어지는 양떼의 모습은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을 것이다. 빨갛고 파란 비옷을 입고 있는 소의 모습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익숙한 풍경은 빠르게 흘러가고 낯선 풍경은 좀더 머물다 흘러간다. 지루할 틈이 없는 여행, 내 옆에서 운전하는 HS와 나는 감성이 잘 맞는다. 서로 못본 풍경이 있으면 “저것 좀 봐”라고 알려준다. 가끔씩 동종의 캠퍼밴이 맞은 편에서 다가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근와 그 운전자는 손을 들어 인사를 나눈다.

그레이마우스에 도착하자마자 ‘할리데이파크 탑 10’으로 갔다. 탑 10은 홀리데이 파크 중에서도 인지도가 가장 높다. 청결한 숙박시설과 다양한 부대시설, 질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파트 도착하면 하는 일은 정해져있다. 정문에 차를 세우면 쏜살같이 파크 사무실로 달려가 예약사항을 확인하고 돈을 지불한다. 그런 다음 주차할 구역의 번호를 배정받고 주차장 맵을 챙겨 차로 돌아온다. 지도를 보고 지정된 곳에 정확히 주차를 하면 비로소 하루밤 묵을 우리집을 찾아낸 것처럼 반갑고 안정된 기분에 젖게된다. 아무리 최신식 내부 시설을 갖춘 차라해도 낯선 곳의 길가에 주차를 하고 하룻밤을 보내야한다면 그다지 즐겁진 않을 것이다.

뉴질랜드는 캠퍼밴 여행자들의 천국이다. 그만큼 캠퍼밴 여행 인프라를 잘 갖추고 있다. 전국 곳곳에 안전하고 편안한 캠퍼밴 쉼터(홀리데이 파크)가 자리잡고 있어 캠퍼밴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켜준다. 캠퍼밴 여행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삶과 여행이 하나였던 실크로드 상인들과 전 유럽을 떠돌아다녔던 집시들, 서부를 멋지게 달리던 역마차들이 그 유래다. 그들은 여행 중에 잠을 자고 음식을 해먹고, 외부 위험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내야 했다. 일생을 통해 머물고 떠나는 일을 수없이 반복해야 했던 그들의 삶이 곧 유랑이자 여행이었고, 그들은 세상 어디든 함께 할 수 있는 움직이는 집이 필요했던 것이다.
 

 

 


주차장에 차 한 대를 세워두고 우리는 모두 한 차에 타고 근처에 있는 뉴월드 마트로 시장을 보러갔다. 마트 마당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온 순간 눈부신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 머리가 향한 쪽에 드넓은 뉴질랜드 서해안 바다가 있었고 그곳에서는 장엄한 일몰이 정점을 찍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나의 눈시울이 느닷없이 붉어졌다. 2008년도 겨울, 우리 일행과 함께 이곳에 머물렀던 스승님이 생각나서 였다.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누구보다 커다란 존재로 가슴에 남아있는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순간 몰려들었다.

뉴월드 마트에는 크레이피시가 매대에 놓여 있었다. 아침에 먹지 못했던 아쉬움 때문에 사람 숫자 만큼 샀다. 모두 좋아하는 것들을 골라 모으니 다시 카트가 한 가득 찼다. 파크로 돌아와 바로 요리에 돌입, 널찍한 주방에 우리가 들어서니 조용했던 공간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누가 무엇을 할지 일러주지 않아도 역할 분담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주방일이 손에 익지 않은 사람까지 자기 몫을 찾아 무언가를 하고 있다. 아무도 노는 이가 없다. 좁은 땅에서 아옹다옹 부대끼며 사는 동안 눈치와 요령은 빠르게 습득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순발력이다. 여행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 하나를 대한민국 국민들은 살면서 저절로 갖추게 되는 셈이다. 어제에 비해 손발들이 척척 들어 맞는다.

긴 시간 여유롭게 식사하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나 여행지에 가면 달라진다. 우리를 재촉하는 사람이나 일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식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여유롭게 밥을 먹고 내일 일정에 대해 브리핑을 진행했다. 그때 2호차 드라이버 DG가 말했다.

“대장, 내가 운전은 웬만큼 하지만 날마다 이런 일정은 무리예요.”
 

 

 

 


돌아보건대 오늘 하루 결코 무리한 일정이 아니었다. 오는 길에 두 세 군데 들러서 차 마시고 주유하고 점심을 먹었다. 따사로운 햇빛도 즐기고 여유도 한껏 즐겼다. 그런데 그는 하루종일 운전만 하는 이 로드 트립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운전이라면 DG도 HS에 뒤지지 않는다. 아니 그는 아주 훌륭한 운전자다. 긴 비행 이후 바로 이어진 일정에 오늘은 어제 보다 더 많은 시간을 달렸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피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달리는 여정이 아무리 이 여행의 중요한 일부라 해도, 이 일정이 쉬운 일정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일정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의견을 마땅히 존중해야한다. 결국 지금의 일정도 다시 더 많이 날리기로 했다.

조정이 잘 끝나자, 아이 둘은 차로 돌아가고, 나머지 어른 분들은 밥 먹고 난 식탁 위에 모포를 보기 좋게 깔았다. 그토록 피곤하다고 하면서 어젯밤에도 그들은 같은 행동을 했다. 형형색색의 게임도구(?)를 꺼내드는 것을 보고 나는 그 자리를 떴다. 내가 애초 기획한 여러 의미로운 저녁 이벤트와 플랜은 접기로 했다. 의미라는 것은 각자가 부여하는 것이기에. 내가 의미롭다고 해서 그들에게도 의미로운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그들이 공명하지 못하는 플랜을 짠 것을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내가 준비한 플랜보다 여행에서만 짜지는 이런 여유롭고 환상적인 게임 플레이에 더 끌리는 것일 뿐이다. 덕분에 내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게 됐다.

차가운 밤 공기를 마시며 캠퍼밴으로 돌아간다. 사랑하는 이층 벙크 침실로 올라가 포근한 오리털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눈 높이에 있는 조그만 창으로 나뭇가지가 보인다. 그 나뭇가지 사이에 초승달이 걸려있다. 아, 이렇게 기막힌 낭만이 어디 있나. 이보다 더 족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이 곳에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잠을 청한다. <계속>

/민경화기자 m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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