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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아주 작은 역사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그 감동의 순간을, 처음엔 전화상으로 안내를 받고 반신반의 하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찾아갔다. 초행길이기도 했고 낯선 사람을 만나야 하는 부담이 적지 않은 무게를 느끼게 했지만 동행이 있어 의지가 되었다. 초여름 날씨는 뜨거웠고 통화를 하면서 약속 장소에 도착해보니 목소리보다 젊은 남자의 활달한 모습이 보였다. 그는 휴대전화를 서서히 얼굴에서 떼면서 나를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나를 확인하면서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선한 웃음이 오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다는 예감으로 다가온다.

싱그러운 햇볕아래 막 초록물이 상큼한 나뭇잎이 일제히 부채질을 해주고 있는 눈부신 외모가 콘크리트 위에 빛나고 있었다. 말 그대로 한 눈에 반한 나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고 즐겁게 식사를 하는 것으로 그와의 짧은 일정을 마무리 지었다.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는 달리 날개옷을 입은 것처럼 가벼웠고 간간이 부는 바람이 향기로 내 머리를 흩어놓았다. 집 앞에는 이미 남편과 이웃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애마는 가볍게 발을 멈췄다. 금빛으로 조형된 카렌스골드의 선명한 영문표식이 내 소유가 되었다.

그 이후로 애마는 나의 모든 일정에 함께 했다. 가게를 방문하는 손님보다 전화나 팩스로 주문하는 통신판매 위주로 이루어지는 꽃방은 나를 머물게 하지 않는다. 시장으로 작품제작에서 배송으로 촬영에서 해피콜까지 나는 서서히 길 위의 여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길을 애마가 있어 가능했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두고두고 마음에 새겨두고 잊지 않았으면 하던 순간도 있었고 그 자리에서 울고 싶은 때에도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성취감이 주는 뿌듯함 못지않은 피로의 흔적이 얼룩처럼 묻어있었다. 무심하게 지나친 날들과 함께 카렌스골드는 카렌스갓으로 승천을 앞두게 되었다. 골드에서 영문 엘자가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나는 계속 카렌스갓을 하늘나라로 보내줄 마음이 없었다. 승천을 하지 못하는 신은 나의 애마로 머물며 궂은 일정을 소화했다. 드디어 또 하나의 금빛 조각이 떨어져 나갔고 그 이름은 카렌스고가 되었다. 그렇게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니 신도 별 수가 없었는지 계속 다니라고 고를 외치게 되었다. 그래, 가보자. 동서남북 어디든 가다보면 모든 길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다녔다.

갑자기 밭은 기침소리가 들린다. 아무리 고를 외쳐도 예전의 걸음을 잊은 듯 보인다. 가까운 정비소로 찾아갔다. 마음을 졸였던 나도 화장실로 향했다. 머리 위로 가느다란 바람이 일고 뻐꾸기가 울었다. 이제 카렌스고는 더 이상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벌써 꽤 오랜 시간을 주차장에 그어진 하얀 선 안에 얌전히 머물고 있다. 나를 만나고 가장 긴 휴식일 것이다. 이제는 이별이 기록 된 마지막 페이지를 열어야 한다. 나는 마지막 한 줄을 추가하기로 한다.

“안녕, 고마웠어. 잊지 않을 거야. 가끔 그리워도 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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