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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배다리저수지

 

자박자박 걷는 걸음이 오랜만이다. 눈에 들어오는 것만 바라보며 오롯이 머리를 비워가는 시간. 열린 하늘 사이로 떨어지는 봄 햇살은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도시계획을 하며 새 단장을 하여 마을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불쑥 들어선 아파트 단지들 가운데 자리한 배다리 저수지. 언제부턴가 습관처럼 찾게 된 그곳에 들어서면 등 뒤에 두고 온 도시의 소음, 일에 매달려 허덕이는 숱한 내 고민들이 아득히 멀어질 때가 있다. 마치 오늘처럼 저수지와 혼연히 하나가 될 때는 더 더욱 그랬다.

이슬도 채 마르지 않은 민낯의 모습이 오늘은 또 얼마나 예뻤으면 단숨에 와락 안겨들었을까. 4월의 배다리저수지는 와글와글 개구리 입 화분 안에서 함뿍 피워낸 키 낮은 꽃들의 미소로 아침 인사를 보내왔다. 새로 심어진 벚나무 어린 것들의 꽃은 숫기가 없어 조곤조곤 속삭인다. 오가며 군데군데 몸집이 넉넉한 오래된 벚나무, 두툼한 껍질을 뚫고 나온 금방 피운 그 어린 꽃들의 분홍빛 미소는 마치 종종걸음으로 뒤를 좇는 강아지 발자국 소리같이 상큼했다. 하얗게 꽃 쏟아내는 조팝나무. 발간 꽃 봉우리 맺기 시작한 진달래, 노랗게 생글거리는 민들레, 그 아래 샐쭉 토라진 듯 제비꽃, 개나리 오소소 뿜어대는 꽃의 수다, 틈틈이 빈자리 채우는 냉이 꽃까지. 먹여 살릴 식구가 많은 배다리저수지의 아침은 제 자리 지키는 꽃들의 수다만으로도 그렇게 시끌벅적했다. 마치 어릴 적 우리 육남매 아침상 받은 그날처럼 말이다.

육남매가 한 집에서 와글거리던 그 4월의 밥상도 배다리저수지의 봄처럼 싱그러웠었다. 뒷밭 둑에서 캐 온 애쑥으로 바글바글 끓여낸 쑥 국에, 입 맛 잃으신 아버지 생각하셔서 어머니께서 사 오신 멍게 몇 마리가 풀어놓은 향기가 가득한 밥상. 둘째, 셋째가 캐왔다는 냉이 나물, 돌 틈 뒤져 조심조심 언니가 캐온 달래로 자작하게 끓여낸 강된장, 묵은 무 달달하게 볶아낸 무나물까지. 온 가족이 품앗이하여 차려진 밥상에선 봄의 향기와 식욕이 넘쳐났었다. 마치 자맥질에 지칠 줄 모르는 흰뺨검둥오리, 멧새, 참새, 까치,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도심의 쉬고 싶은 사람들까지, 그 대가족 오롯이 품어 안은 배다리저수지의 봄 싱그러움처럼 말이다.

수원청개구리가 서식한다는 팻말을 끼고 한 바퀴 저수지를 돌아 문득, 모퉁이 내어놓는 동산으로 올랐다. 지난 가을 그 예뻤던 단풍 다 내려놓고 새 잎 맞은 키 큰 나무가 마주 보는 저수지 안. 우수수 풀죽은 철지난 갈대의 빈 대궁들이 보였다. 누구에게나 제철은 있는 법. 나에게 제철이 너에게는 휴지기가 되기도 하고 당신에게 휴지기가 어떤 이에게는 제철이 되기도 하는 이치. 서서히 나이 들어 제철 끝났을까 애태우기보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배다리저수지의 소박한 사계절처럼, 누구에게나 소박한 제철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기회 또는 휴지기가 아닐까 싶다. 대단한 대박의 인생보다 어쩌면 수양버드나무 여린 잎 늘어뜨리고 멧새, 참새, 봄 풀냄새 가득히 불러들일 줄 아는, 뽐내기보다 제자리 지킬 줄 아는, 소박한 제철의 삶이 더 멋지지 않을까 싶다. 배다리저수지 돌아 나오며 나는 또 이 봄 더불어 나의 제철 삶속으로 서서히 걸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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