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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4개주 7시간 도로위 질주… 초봄부터 초여름까지 광활한 대륙을 보다

 

이한숙 작가의 감성여행기

미국 윌리엄스버그 앚

댈러스 출장을 마치고 뉴욕으로 갔다. 1년 만의 방문이고 횟수로는 8번째다. 뉴욕은 매번 새롭고, 미지의 얼굴로 나를 유혹한다. 다녀온 곳에 다시 가는 것보다는 가보지 않은 곳에 가는 것을 더 흥미로워하는 나이지만 뉴욕 만은 예외다. 그러나 이번에는 친구의 제안으로 뉴욕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출장을 마친 후, 스스로에게 선물한 휴가는 일주일. 친구는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선물로 준비하는 여행인데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나 만큼이나 여행을 좋아하고 또 나의 기호를 아는 친구이니 실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안 가본 곳엘 간다니 궁금하고 설레였다.

뉴욕에서 아침 맞고 새로운 여정 떠나
동행한 친구, 목적지 말해주지 않아 신선

뉴저지∼메릴랜드 650㎞ 음악과 함께 해
창밖으로 바람까지 더해 여행자의 특권 누려
여행이란 낯선 길에서 찾는 인생의 길인듯

7시간 도로위 질주가 어느새 꿈처럼 흘러
일행은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에 도달

 

 

 

 


사람이나 음식은 안 가려도 여행지는 좀 가리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자의식 때문이다. 나이들수록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빨라진다. 날마다 이 세상에 머물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 타고난 방랑벽 때문인지 한군데 붙어있질 못하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다. 언제까지 여행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여행하며 살겠다’고 다짐해보지만 내일 일도 모르는 게 우리 인생이다. 그러니 남은 인생에서 내가 가장 젊은 지금이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왕하는 여행, 조금 더 신경써서 만족스런 여행을 하고 싶다.

해가 막 뜨는 시간에 일어났다. 창문 밖으로 맨하튼의 실루엣이 보였다. 햇빛에 반사돼 음영 대비를 이룬 빌딩 숲이 아름다웠다. 와플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출발했다. 달리는 차의 백미러에도 멀리 맨하튼의 건물들이 보였다. 마치 백미러가 빛이 부리는 마술의 캔버스가 되어주는 느낌이었다. 부활절 봄 방학으로 거리는 한산했다.

 


뉴저지, 펜실베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 4개주를 통과하는 650km 대장정, 장장 7시간을 도로 위에 있어야하는 여정이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달리는 동안 초봄의 뉴욕 날씨에서 초여름의 남부 버지니아의 날씨까지 계절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싹이 움트지 않은 북부의 황량한 나무들과는 달리 남부의 숲은 초록 잔치를 시작하느라 부산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달리는 95번 도로는 남쪽으로 곧장 이어져 플로리다까지 이어지는 주간(inter-state)도로다. 일반 국도 주변에 가게와 식당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것과는 다르게 95번 도로 주변에는 휴게소가 없었다. 도로를 빠져나가 마을이나 도시로 진입을 해야 주유도 할 수 있고 요기도 할 수 있었다. 휴식을 위해 이따금씩 들르는 마을들의 다른 풍경과 느낌을 즐기는 일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었다.

친구는 운전을 좋아한다. 나도 예전에는 운전을 무척 즐겼다. 그러나 이제는 한 시간 이상 운전하면 주의력이 떨어져 급격히 피로해진다.

 


그래서 요즘엔 가급적 운전을 하지 않는다. 그점에서 친구는 여전히 팔팔하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운전하면서도 쌩쌩하다. 이런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는 극명하다. 나는 숨쉬는 운동과 약간의 스트레칭 외에는 하는 운동이 없다. 그는 운동 매니아다.

헬스클럽에 가지 않고 동네를 달린다. 여행을 할 때는 숙소 주변을 달린다. 새로운 곳에 당도해 그 지역을 익히는 방법이 그에게는 조깅인 것이다. 그렇게 발로 도시를 익히면 남들 두 배의 밀도로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그러므로 조깅은 그에게 운동일 뿐 아니라 철마다 주변을 새롭게 느끼고 오감으로 자연을 호흡하는 좋은 수단이다. 눈이 오거나 비가 오고나 그는 조깅을 쉬는 법이 없다. 몸의 물리적 밸런스를 위해 일주일에 세 번 필라테스를 하러 가기도 한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신중하고, 일단 시작하면 꾸준히 한다는 것이다. 그는 누구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무엇을 하지 않는다. 예의 범절에 익숙한 내게는 가끔 그런 그가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동 동기를 자신 안에서 찾아내는 그가 존경스럽다. 덕분에 많이 배운다.

그가 여러 시간을 운전해도 피곤하지 않은 건 일상을 관리하는 그런 힘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멀리 가는 여행이라도 그가 운전하는 차에 앉으면 불안하지 않다. 오랫만에 친구 차 옆에 앉아 이렇게 여행을 한다. 집에 돌아온 듯 편하다. 더구나 이런 로드 트립을 나 역시 친구만큼이나 즐긴다.

양말을 벗어 던지고, 지붕에 난 창을 열어 공기가 들어오게 하고, 두 다리를 콘솔 위로 올리고 조금 열린 창문 틈으로 손을 내밀어 바람을 느낀다. 좋다. 남들이 일하는 시간에 이렇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수자의 특혜를 누리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래서 감사하다.

여행을 떠나는 순간 마법처럼 나는 다른 존재가 된다. 모든 타이틀을 다 뗀 그냥 내가 된다. 무슨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순간 집에 두고 온 것들을 까맣게 잊는다. 어깨를 짓누르던 일상의 짐까지도 마찬가지다.

 


친구가 토미 엠마누엘(Tommy Emmanuel)의 기타 음악을 튼다. 토미의 음악은 저절로 눈을 감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마크 로스코의 말년의 작품처럼 담백하고 영감에 어려있다. 어느 해인가 그의 콘서트를 백암홀에서 보았다. 기교 뿐 아니라 영혼이 충만한 그의 연주는 감동그 자체였다. 그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피아노처럼 기타는 반주가 아닌 독주 악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타 홀로서도 충분히 다채로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의 솔로 연주 ‘아침공기’(Morning Aire)는 특히 좋다. 뺄 게 하나도 없이 느껴지는 그 단순함이 마음을 깊이 흔든다. 아름다운 음악은 영혼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급기야 순수하게 우리를 정화한다.

36살의 영국출신 송라이터 크레이그 데이빗(Craig David)의 목소리는 또 왜 그리 좋은지. 그리고 킨(Keane)의 앨범 ‘희망과 두려움(Hopes and Fears)에 수록된 곡들과 스팅의 ‘금빛 들판’(Field of Gold),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 같은 노래들… 친구의 취향 덕에 달리는 동안 음악의 향연에도 빠진다. 여행지를 향해가는 동안의 시간도 참 좋은 여행이 된다.

달리면서 친구와 나눈 이야기도 좋았다. 특히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나눈 이야기는 오래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충청도 보은 산골짜기에 살던 어린 시절, 나는 이민간 친구 주이를 통해 미국이란 나라를 동경하게 됐다. 주이 때문에 지도 위의 나라였지 현실일 수 없었던 미국이 내게 처음으로 현실로 다가왔고, 이후 나는 세계를 누비며 사는 삶을 꿈꾸게 됐다. 그러니 미국을 국내처럼 친숙하게 오가게 된 지금의 현실이 격세지감, 믿기지가 않는다.

 

지구촌 어디나 친구가 있는 지금의 나는 평범한 가정 주부가 된 주이보다 더 자유로운 삶을 산다. 내 인생의 반은 인도됨이고 나머지 반은 나의 의지로 열어왔다. 내가 의도하고 선택하지 않았으면 이런 삶이 결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또 다른 인생의 기회가 내게 문을 열어주고 있다. 언제든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항상 그 자리에 좋은 친구로 존재해 준 친구가 새삼 고맙다.

윌밍턴을 지나고, 볼티모어를 지나고, 워싱턴DC를 지나고, 리치먼드를 지나고…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도 하면서 어느새 7시간이 꿈결처럼 흘렀다. 해가 따가운 오후, 아직 2시도 안된 시간에 우리는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에 무사히 도착했다.

/정리=민경화기자 m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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