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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옹성 위 적루(上)

 

수원화성의 건축은 모두 정조가 주관하여 만들었을 것 같은데 뜻밖에 아들 순조에 의해 만들어진 건축이 있다.

순조는 아버지(정조)를 추모하기 위해 수원에 관련시설을 건축한다. 정조 사당인 화령전(華寧殿)과 정조가 수원을 떠나기 싫어 시간을 끌던 지지대고개에는 비(碑)와 비각(碑閣)을 세웠다. 그런데 이외 성곽에 새로운 방어시설인 적루를 추가 설치를 한다. 추모시설을 새로 짓는 것은 아들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다. 하지만 위대한 선왕이 만든 화성에 방어시설을 추가하는 것은 원래 잘못 만들어졌다는 인정을 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화성의 방어시스템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순조는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부담스러운 일을 추진한 것일까?

정약용이 제시한 기본설계에서는 적루를 남·북대문의 좌우에 하나씩 설치한다고 되어있다. 또한 무비지(武備志, 당시 성곽 전문지로 참고문헌)의 옹성도(甕城圖)를 보면 적루는 성문 좌우의 적대 위에 설치되어 있어 다산의 계획과 같다. 그러나 지금의 적루의 위치는 적대가 아닌 옹성문 위에 있다.

정조는 화성을 처음 만들 때 옹성 위 적루를 검토하지만, 굳지 세우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판단하였다. 화성성역의궤에서는 ‘옹성 위에 적루를 세우지 않은 것은 본성이 가로로 있어 적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순조는 이런 내용을 알았지만, 필요로 1824년에는 북·남옹성 위에 적루를 추가 설치한다. 옹성이 준공된 지 30년이 지난 시점이다. 순조시기에 방어 조건이 변한 것이 아니라, 방어 취약점이 발견되어 적루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순조시기에 새롭게 발견된 옹성의 취약점은 무엇일까. 수원화성 이전에 강화도의 돈대 등에 벽돌을 사용한 적이 있었으나 기술과 경험 부족으로 좋은 성과를 나타내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북학파 박제가 등 여러 실학자는 석성의 문제점과 벽돌성의 우수성을 들면서 벽돌성의 건설을 주장한다. 북학파의 돌에 대한 의견은 ‘돌 자체는 강하지만 조합하여 쌓을 경우 하나만 빠져도 무너지고 또 화공에 당할 경우 갈라지고 터진다.’라며 석성의 부적합을 주장했다. 벽돌에 대한 의견에서는 ‘벽돌 자체는 돌보다 약하지만, 회를 이용하여 벽돌을 쌓으면 튼튼하고 일부가 빠져도 무너지지 않는다. 또 화공을 당해도 벽돌은 불에 강하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라며 벽돌성을 최고로 추천했다.

화성의 기본설계자인 정약용은 벽돌이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의 의견을 낸다. 하지만 중국을 가보지 못한 다산의 의견이 정조를 설득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래서인지 다산은 기본설계 후 더는 공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다산의 기본설계에 북학파와 정조 및 감독관의 의견이 합해져 실정에 맞는 변경계획안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배치, 시설, 재료 등 모든 분야에 설계변경이 일어나게 된다. 특히 재료에서는 본성을 석성으로 하고 공격시설 등 적군과 만나는 곳에는 벽돌을 사용하게 되었다.

성곽은 방어시설이며 이중 최첨단에 있는 시설이 옹성이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밖에 만든 작은 성으로 적군의 공격이 가장 받는 곳이다. 그래서 옹성문(甕城門)은 매우 중요하며 방어력을 최대로 높여야 하는 곳이다. 기본설계에서는 남·북옹성문에 홍예와 오성지를 채택하였다.

의궤에서 적루를 설치하지 않은 이유를 본성이 옹성의 가로로 있어 설치하지 않았다고 하나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 성곽은 없다. 이 비합리적인 의견으로 적루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옹성 위에 적루를 설치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 두 개의 시설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의궤에서 이 부분을 쓴 사람은 완성된 홍예와 오성지가 잘못 만들어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를 밝히기 어려워 다른 의견을 전개하였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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