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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나, 떨고 있었다 - 부제 판문점의 추억

 

우리 겨레에게 너무 깊고 아프게 새겨진 화상보다 뚜렷하게 남아 아직도 통증이 엄습하는 상처가 판문점이다. 요즘 판문점이 다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 판문점이 우리 동네에도 있었다.

시골에는 어디 가나 있을 법한 지명으로 새말이라는 곳을 가려면 크게 뚫린 신작로에 이어진 약간의 경사를 만난다. 그 언덕길이 뱀재라는 곳이었다. 그 많은 이름을 두고 왜 뱀재라고 지었는지 모르지만 길고 구불구불해서 걸어 다니기에는 숨이 찬 길이 있었다. 그 경사 끝에 달린 모롱이를 지날 무렵이면 언덕 위에 판문점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달린 집이 하나 있었다.

그 당시에 흔히 보이는 기와지붕 밑으로 국방색이라고 불린 어두운 녹색 바탕에 까만 글씨로 간판은 한 눈에 보기에도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국한문 혼용 교과서를 통해 막 한자를 깨우치기 시작하던 나에겐 판문점 이라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많은 의문과 두려움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시골에서는 드물게 네모반듯한 유리로 된 문에도 칸칸이 판문점이라는 글씨가 한 자씩 쓰여 있었고 문은 항상 닫혀 있었다. 더 이상한 일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이 드나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반공을 국시로 알고 간첩식별 방법을 배우고 불온 삐라를 주워 파출소에 갖다 주면 착하다고 칭찬받고 연필과 ‘자유의 벗’이라는 얇은 책을 상으로 받고 자랑을 했다. 학교에서도 반공 방첩이라는 글씨와 빨갱이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가 교실 뒤편이나 복도에 붙어있던 시절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혼자 그곳을 지나려면 처음엔 너무 무서워 살금살금 걷다가 그 집이 보이는 곳부터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했다. 그 앞을 지나면서 쏜살 같이 빨라졌다. 혹시 그 안에서 얼굴이 빨갛고 머리에 뿔이 달리고 호랑이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학교에서 본 무시무시하게 생긴 빨갱이가 나와서 시커먼 털이 숭숭 난 손으로 내 머리를 잡아 끌고 갈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차라리 학교 화장실에서 “빨간 주머니 줄까 파란 주머니 줄까?” 하는 귀신을 만나는 편이 덜 무서울 것 같았다. 나는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다시는 그 친구네 집에 가지 않기로 맹세를 하면서 바래다주지도 않고 자기 집 앞에 있는 봇도랑에 놓인 널빤지 다리를 건너자마자 잘 가라며 손을 흔들던 친구를 원망했다.

세월은 모든 것을 잊게도 하지만 오래 된 기억을 살리기도 한다. 요즘 판문점이 이슈가 되면서 갑자기 어린 시절 나를 공포에 떨게 하던 판문점이 떠올랐다. 그 집이 부쩍 궁금해진다. 아니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이 궁금했다. 아직 그 근처에 사는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물어보니 너무 어이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본시 양반이라고 하는 사람이 장사를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숨기고 싶었던지 상호를 판문점이라고 지었다. 한자로 쓰인 간판을 달고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을 상대로 막걸리나 소주도 팔고 과자나 빵 부스러기 같은 먹는 것을 팔았다고 한다. 그 집 주인할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몇 해 전까지 사시다 돌아가셨다는 얘기에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히 나만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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