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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나침반 따라온 소년공, 이제 새로운 경기號 선장

흙수저로 태어나 어려서 공장 전전
노무현 영향받아 인권변호사 활동
시민운동 한계 느껴 정치에 입문
성남시장 취임 후 부채청산 ‘허리띠’
공공성 강화 3대 무상복지 실현 앞장

 

 

 

경기도지사 당선자 이 재 명, 그가 걸어온 길

이재명은 1963년 경북 안동 태생이다. 본래 5남 4녀지만, 누이 둘이 일찍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5남2녀 중 다섯째로 자랐다. 열 살에 아버지가 돌연 집을 떠난 뒤 어머니와 일곱 남매가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유지했다. 가난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이 중학교에도 진학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국민(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그의 가족은 성남 빈민촌에 정착한다. 나이가 어렸던 그는 다른 사람의 신분과 이름을 빌려가며 여러 공장을 전전했다. 실제로는 취업이 불가능한 소년공이었지만, 신분이나 이름으로는 성인인 채로. 거친 공장생활에서 수많은 사고를 당했다. 당시 부상당한 왼팔 장애로 병역 면제를 받았다. 학교도 다니지 못했는데 군대조차 갈 수 없다는 건 그에게 또 하나의 좌절이었다. 극복한다.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에 잇따라 합격한 것.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각고의 노력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나간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단행했던 교육개혁 조치가 이재명의 인생에 전화위복이 됐다.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학력고사만으로 대학에 갈 수 있게 됐고, 과외가 금지되면서 장학금 제도가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이재명은 생계를 위한 공장 일과 공부를 병행해 전액장학금에 매월 생활비 30만원이라는 파격 조건을 내건 중앙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학교에서 주는 생활비 일부를 다달이 셋째형에게 보내 공부를 도왔다. 7남매 중 대졸자는 그와 셋째형 둘 뿐이다. 훗날 그와 부당한 시정개입 등을 이유로 갈등을 빚었던 바로 그 형이다.

1982년, 우연히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접했다. 매스컴의 말대로 광주시민은 폭도라 믿었던 그 였다. 권력과 언론에 속아왔다는 분노는 이내 정의구현을 향한 의지로 바뀌었다.

1986년 제28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는 사법연수원에서 성적이 좋았다. 하지만 그는 변호사의 길을 선택한다. 검사 임용을 앞두고 갈등했지만 군사정권의 주구가 되지 않겠다는 소신과 집안형편 사이에서 시민을 선택한다.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노무현의 영향이 컸다. “변호사는 굶지 않는다”던 그의 말에 속았을 수(?)도 있다.

1987년 7월 14일, 이재명은 일기장에 이러한 결의를 남겼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나의 지식과 자격을 필요로 한다. 역사가, 민족이, 노동자가 핍박받고, 가난한 민중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마침내 변호사 개업을 결심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사법고시 최종합격 한달 뒤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께는 주변 사람들에게 성적 때문에 변호사를 하게 됐다고 둘러댔다. 차마 판검사 자리를 제 발로 차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였다.

 

 

 

 

변호사 이재명은 성남에서 주로 노동과 인권사건 변호를 맡으며 민변 활동을 했다. 시민들과 뜻을 모아 ‘성남시민모임’을 창립하며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의혹’과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을 파헤쳤다. 정치권력, 언론, 돈, 조직 등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지만 거대한 부패 기득권 세력 앞에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다.

2004년, 성남 구시가지의 대형병원들이 문을 닫으며 의료공백이 심각해졌다. 이에 공공의료원 설립을 목표로 시민 2만 명의 뜻을 모아 주민발의 조례를 만들었는데, 시의회로부터 47초 만에 날치기를 당하고 만다. 한 교회 지하실에서 서럽게 울던 그는 시민의 권한을 대리하는 시장이 돼 직접 시립의료원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정치 입문을 결심한 순간이다.

2010년 51.2%의 득표율로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시장이 된 그가 처음 마주친 것은 6천500억 원이 넘는 부채였다. 그는 이를 청산하기 위해 곧바로 허리띠를 졸라맸다. 부채 청산 및 복지의 비결은 이른바 ‘3+1 원칙’이다. 부정부패, 예산낭비, 세금탈루를 없애고 그렇게 아낀 예산으로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시장실도 2층으로 옮겨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했다. ‘아방궁’이라 비난받던 기존 9층 시장실에 아이사랑놀이터와 북카페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또한 SNS로 시민과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며 시정을 알리고 보완했다. 2013년 마침내 정치 입문의 계기이자 공공성의 상징인 시립의료원의 첫 삽을 떴다.

2014년, 그는 득표율 55.1%로 재임에 성공한다. 이때 보수가 우세한 분당에서 오히려 득표율이 오르는 이변이 일어났다. 실적과 실력만으로 불리한 정치지형을 극복해낸 것이다. 그러나 여소야대의 시의회 돌파는 녹록치 않았다. ‘청년배당·산후조리·무상교복’으로 대표되는 3대 무상복지 역시 시민들과 손잡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이룬 결실이었다.

 

성남시장으로서 살림, 소통, 복지, 공약이행 등에서 이재명이 이룬 업적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두드러지는 업적은 시민의 주권의식을 공고히 한 것이다. ‘시민이 주인인 성남’이라는 슬로건처럼 그는 언제나 시민이 주권자고 정치인은 대리인일 뿐임을 강조했다.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을 해소하고 참여를 독려하며 민주주의의 본질을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

 

 

 

 

삶의 나침반은 언제나 ‘공정’이었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 그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국민들과 가장 가까운 촛불의 선봉에서 박근혜 퇴진을 부르짖었던 이유다.

진정성을 알아본 국민들은 그를 단숨에 대선 경선후보로까지 불러냈다. 이때 이재명은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소명을 분명히 했다.

이제 도민들은 그에게 경기도에서 그 쓰임을 다하라고 명하고 있다. 이재명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복지도시 성남을 만들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도민 누구나 자긍심을 느끼는 새로운 경기도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슴에 품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런 것들을 실천하는 길 위에 섰다, 경기도지사다.

/양규원·최준석기자 y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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