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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슬칼럼]특별한 장소와 시간의 축복

 

 

 

“때로 무심하게 생각에 잠겨/ 카우치에 누워 있을 때면/ 수선화가 내 마음의 눈에 떠오르고/ 그건 고독의 축복이 되네.” 윌리엄 워즈워드 「나는 구름처럼 외로이 거닐었네」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정년퇴임을 하게 되면서 고별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65년이라는 짧지 않은 인생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수많은 장소와 시간들이 스쳐지나가고 특별한 장소와 시간에 시선이 좀 더 머무는 것을 발견했다. 장 그르니에가 말했듯이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엄청난 고독 속에서 각별히 소중한 장소와 시간을 지나게 되고 그 어떤 순간 우리는 자신과 만나게 된다.” 그곳은 현재적 삶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되돌아가게 하는 시원(始原)의 공간이자 시간이다.

며칠 전 ‘수원문학인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의 짧은 수상소감도 이에 관한 것이었다. 나에게 각별히 소중한 장소와 시간은 진해에서의 유년시절이다. 선친이 중학교 교장으로 계시던 사택의 뜰은 의식 깊은 곳에 강력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다. 앞뜰의 탱자나무 울타리와 뒤뜰의 대나무 숲, 깊고 검은 우물은 각기 다른 이미지로 나의 삶에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나던 노란 탱자들은 순수와 지복의 이미지를 형성해주었으며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때면 대나무 숲에서 들리던 기괴한 소리들은 불가시적인 대기와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우주의 신비를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특히 이상한 정적에 휩싸여 있던 깊은 우물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매일 아침 눈만 뜨면 우물가로 달려갔다. 우물 속에는 하늘이 있고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한결같이 나를 응시하는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작은 우물이 비춰주는 세계는 나만의 내밀한 ‘비밀의 정원’이었다. 가끔 빗방울이 떨어질 때면 그것이 만들어내는 파문에 마음에 잔물결이 일었고, 그 미세하고 작은 빗방울이 나와 세계를 기이하게 변형시키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우물 속에 머리를 깊숙이 들이밀고 나지막하게 내어본 소리가 크게 메아리칠 때면 말할 수 없는 음향적 신비를 느끼기도 했다. 이 상징적 이미지들을 통해 나는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년의 뜰은 나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세계를 인식해나가는 시간과 공간의 출발점이었으며 이제 침묵처럼 길고 고독한 인생의 서사가 펼쳐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년의 경험은 훗날,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우물 속에서 발견했던 작은 세계가 선친인 김달진 시인의 시 「샘물」(“숲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에서 하나의 소우주로 재현되는 것을 보고 각 개체가 세계 속에 존재하는 방식과 그 문학적 표현에 눈뜨기 시작했다. 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각각의 사물들이 고유의 빛을 발하며 하나의 생명체로 꿈틀거리면서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고향을 떠나온 후 낯선 시간과 공간속에서 두려움을 느낄 때면 햇살에 반짝이던 노란 탱자는 알 수 없는 비밀의 정기로 내면의 불안을 잠재워주었다. 속세의 때로 덮여 나에게서 멀어져 있던 그 특별한 시간과 장소가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나면서 나 자신이 되고 싶었던 그때의 나를 만날 것만 같았다. 유년의 기억이란 세속의 덧칠을 벗겨주는 정화이자 참 나의 회복임을 이제 65년 인생의 착잡한 고비에 이르러 새삼 깨닫게 된다.

회상의 시인으로 불리는 윌리엄 워즈워드 역시 어린 시절에 보았던 수선화가 가져다 준 회상의 기쁨을 ‘고독의 축복’이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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