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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남공심돈(南空心墩)

 

 

 

다산 정약용의 설계에서 배제되었던 수원화성의 공심돈은 우여곡절 속에 만들어졌다. 당시 국가 공사의 감독은 무인 관료들이 맡았기에 수원화성의 현장감독도 대부분 무관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공사 총감독은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 1740~1799)였지만, 실제 현장 감독은 도청(都廳) 이유경(李偶敬, 1747~?)이었다.

을묘년 혜경궁의 환갑자치가 이루어지기 전에 일어난 화성 1차 공사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급하게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2차 공사는 1차 공사의 경험이 쌓이고 또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이유경은 기존 설계보다 더 나은 시설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이 생겼다.

마침 다산의 화성설계 기초가 되는 모원의(茅元儀)가 쓴 무비지(武備志)를 이유경이 보게 된다. 무비지의 성제(城制) 마지막 부분은 공심돈인데 이유경은 공심돈이 좋은 시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배제되었던 공심돈을 화성에 설치하기 위해 의견을 개진한다. 하지만 상관인 수원유수 조심태의 반대로 공심돈의 실현은 어려움에 부딪힌다. 공심돈의 효과에 대해 두 사람은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정조에게 보고가 된다.

다산이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내려간 이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정조는 다산이 공심돈을 배제한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이유경의 적극적인 노력에 정조는 그의 손을 들어주고(정조실록, 1797년 1월 29일) 공심돈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 팔달문의 동쪽에 있는 남공심돈이다. 그리고 공심돈은 점차 발전을 거듭하면서 방어능력이 향상되고 크기도 거대해진다. 2번째로 만들어지는 서북공심돈은 크기만 보면 남공심돈의 4배가 되고,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동북공심돈은 서북공심돈의 4배가 된다.

이유경의 독단적인 첫 작품인 남공심돈 위치는 남성의 동쪽 끝에 있으며 이곳은 다산이 포루(砲樓)로 계획한 곳이다. 그가 이곳에 공심돈을 설치하게 된 이유는 취약하게 만들어진 남암문과 앞으로 만들어질 남수문을 경량하게 만들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남암문은 화성성곽시설로는 최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벽돌 사용에 미숙한지 모두 돌로 만들어져 화공(火攻)에 취약했다. 또 문짝이 외부에 직접 노출되어 있어 화성의 암문 중 가장 방어력이 약한 시설이라 보완이 필요했다. 또 수문은 홍수로 인해 무너지기 때문에 여기에 다른 시설을 추가하는 것은 합리적인 방안이 아니었다. 이로써 나중에 만들어진 남수문은 남공심돈의 높은 공격력 덕분에 북수문과 달리 누각을 제외하고 만들어지게 된다.

남공심돈의 건축적 공간을 살펴보자. 평면은 기둥 4개로 구성된 한 칸이며 한 변의 길이는 6.5척(약 2.1m), 실면적은 4.41㎡(1.3평)로 서북공심돈 4칸의 1/4 크기로 매우 작다. 공심돈은 3개 층으로 구성되어있고 벽돌 안 총 높이는 16.5척(약 5.1m)이다. 한 층의 기둥 높이를 6척(1.85m)이고 도리 높이를 고려하면 실사용 높이는 1.7m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심돈 내부가 좁아 여러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한 칸 정도의 면적에 무기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계단이 2개씩 설치되어 더 좁았을 것이다. 과연 여기서 불랑기포를 쏠 수 있는 공간이 나올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든다. 또 불량기포를 발사할 경우 작은 공간으로 인해 그 폭발음이 빠져나가지 못해 군인들은 소음으로 큰 고통을 받았을 수밖에 없어 첫 공심돈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나중에 만들어지는 공심돈은 이를 토대로 더 발전된 모습으로 만들어진다.

남공심돈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 7월12일 폭우로 무너지고 그 후 복원되지 않아 지금까지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수원화성이 만들어질 때부터 남암문 앞에는 장터가 만들어지고 계속 발전하였기에 성곽이 성(城) 내외부를 단절시킨다고 생각한 상인들은 복원을 반대하였다. 또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복원을 지시했으나 또 상인들의 반대로 좌절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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