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7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사색의 뜨락]누구나 나 홀로 존귀하다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니,/ 세상이 고통속에 있으나/ 내 이를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싯달타 왕자가 모친 마야 부인의 옆구리로 세상에 태어나 일곱 발짝의 걸음을 걷고 남긴 탄생게다.

이교도들이 표면적으로 결국 “불교도 자신이 신이 되고자 신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의 여지를 주는 대목이다. “갓 태어난 신생아가 어떻게 일곱 발짝을 걸었다고 하며 또한 이 우주에서 자신이 가장 잘났다고 하였으니, ‘오만’함의 극치 아닌가, 겸손조차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이보다 더한 자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하다면 결국은 불교도 ‘오만한 종교’가 아니던가.”

이교도뿐만 아니라 일본의 저명한 불교문학가인 와타나베 쇼코도 자신이 지은 책 ‘불타 석가모니’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뜻을 비슷무리하게 풀이하였다. 쇼코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와 선정, 지계와 선근에서 자기만한 경지에 도달한 이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말은 이러한 뜻을 가리킨다”라고.

그러나 공부가 조금이라도 된 불자라면 쇼코의 이러한 표피적 견해에 공감할 수 없으며 쇼코는 명백하게 해석의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에서 ‘독존(獨尊)’에 방점을 찍어야하는 것이다. ‘부처는 최고이고 부처만이 지존’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크게 어리석은 해석이며 빗나갓음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이 부분은 깊은 종교적 상징성과 중생들에게 깨우침을 전하여 주는 울림이 도사리고 있음을 자각하여야 하며 인류에게 던지는 ‘사자후’인 것이다. 그 상징성은 곧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 부인의 옆구리로 태어나 일곱 발짝의 걸음을 걸었다는 일화의 존재 이유이다.

이는 싯달타의 계급적 한계인 크샤트리아 즉 무사 계급으로써 옆구리에서 태어남은 태생적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다.

싯달타가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나머지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땅을 가리키겠는가?

이는 우주를 통찰하는 ‘깨달은 부처의 정체성’이며 우주를 여실히 깨달은 ‘부처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아(唯我)’인 것이다. ‘유아(唯我)’의 나(我)는 작은 나가 아니며 큰 나이고, ‘소아(小我)’가 아닌 ‘대아(大我)이다. 이 우주를 관통하는 오직 하나뿐인 ‘나’인 것이다.

룸비니의 동산의 어린 왕자는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하늘 위와 하늘 아래, 무엇이 홀로 존귀한가?”, “무엇이 숨을 쉬고, 무엇이 노래하고, 무엇이 생각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물음이 중생의 고통을 헤아려,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 바다에 던져진 중생을 깨우쳐 주는 첫 일성인 탄생게 이며 고해에서 허덕이며 사는 중생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는 것이다.

“내가 없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우주도 결국은 없는 것이다.”

나 홀로 존귀하니 인간 누구나, 누구든 존엄하다는 일깨움이며 이보다 더 큰 휴머니즘은 고금이래 어느 역사에서도 또 다시 없음이다. 그리하여 불교는 결코 신본주의가 아닌, 사람 우선주의이며, 이를테면 ‘인본주의’를 표방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