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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화홍문 中

 

화홍문은 2번의 붕괴와 복원으로 원형을 추정하기는 무리가 있다. 다만 창건 시기에 만든 화성성역의궤가 있어 원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의궤에 실린 건축도(투시도)와 글에 서로 다른 부분이 많아 내용 파악이 쉬운 일은 아니다. 건축도는 설계도면으로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만들어져 보고와 공사용으로 사용되고 의궤의 글은 공사가 끝나고 현장 조사를 거쳐 작성한다. 현대에도 공사 도중 설계변경이 일어나는 것은 다반사인데 당시는 더 많은 설계변경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때문에 공사 이전에 만든 건축도와 준공건물이 일치할 수 없다. 의궤에서 글 내용을 건축도보다 더 신뢰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건축도는 설계 의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의궤의 글 내용 중 중요 부분을 재료 및 위치별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건축도와 다른 점과 복원과정에서 변화된 부분을 살펴보자.

첫째, 돌로 만든 수문에는 홍예가 7개 있는데 중앙 홍예가 폭도 넓고 높이도 높다. 이에 비해 남수문의 9개 홍예는 특별히 큰 것이 없다. 남수문의 상부에는 벽돌로 만든 포사가 있어 특별히 중앙을 강조할 필요성이 없고 북수문은 위에 누각이 있어 중앙 어칸을 강조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리 상부의 배수를 위해서 내외부에 장대석을 놓고 이곳 외부에 7개의 석누조를 홍예 중앙 위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내부는 홍예 사이에 석누조 없이 장대석에 6개의 구멍만 뚫어서 처리하였다. 외부홍예에는 철제살문을 달아 사람의 출입을 막고 홍수 시기에는 철제살문을 열어 물이 원활하게 흐를 수 있도록 하였다. 철제살문의 개패는 홍예 내부가 아닌 다리 상부에서 줄을 살문과 연결하여 여닫았다. 여기서는 의궤의 글과 건축도의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또 1차 복원에서 변화한 홍예구조를 제외하면 현재까지도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둘째, 여장(女墻)부분은 건축도와 글 내용이 다르며 1848년 1차 복원과 1926년 2차 복원을 하면서 변형된 부분이 보인다. 외부에 설치된 첩(堞) 높이는 5.4척(1.6m), 두께는 4.8척(1.48m)이고 타구(探口, 여장에서 타와 타 사이에 열린 부분)는 없으며 아래에는 대포혈(大砲穴) 8개(1x1척), 위에는 소포혈(小砲穴) 14개(0.7x0.7척)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궤 기록에는 첩 위에 여장이 별도로 나와 있지 않으나 건축도에는 타구가 있는 일반적인 여장이 보인다. 기록에 여장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여장은 성곽 전체에 설치되어 굳이 여기서 별도로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차 복원에서 원형과 달라진 점은 첩의 두께와 여장의 타구이다. 첩의 두께는 여장의 두께 3척보다 2.4척 더 크므로 이곳에서 군인들이 총을 쏘았다. 1차 복원은 1920년 이전의 옛 사진을 통해서는 첩과 여장의 두께를 의궤의 내용과 같이 만들었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첩의 두께가 커 보이지는 않는다. 또 여장에 타구가 없는 평여장으로 되어있다. 필자는 창건당시 여장의 타구가 있었다고 본다. 평여장이 화성에 나타난 것은 축성공사의 막바지인 1896년에 만든 동옹성(東甕城)부터이니까 1894년에 만든 북수문에 평여장이 설치되었다고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평여장을 복원 과정에서 추가되었을는지 의문이 남는다. 추정해보면 의궤에서는 여장을 언급하지 않고 타구 없는 첩(堞)만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2차 복원에서는 1차를 기준으로 하여 타구 없는 여장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다.

내부 쪽 다리 위에는 장대석 한 단을 설치하고 물구멍을 6개 뚫었는데 홍예들 사이에 위치한다. 이 장대석은 옛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어 1차 복원에서는 반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차 복원에서는 오히려 2단 장대석으로 올리고 물구멍은 만들지 않았으며 이 모습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셋째, 누각 부분은 의궤의 재용(재료의 사용)편 내용을 보면 내부에 고주(高柱) 두 개가 있고 대들보(12척) 2개와 퇴보(7척) 2개가 있어 건물의 너비(梁間)는 19척이다. 다리의 너비는 31척이고 첩의 두께가 4.8척이니 통로는 약 7척(2.1m)정도가 남는다. 지금 누각의 너비는 15척으로 작아졌고 대신 통로가 넓어졌다. 건물의 너비가 작아지면서 내부에 고주도 생략되었다. 이런 변화는 1차 복원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옛 사진만 갖고 알 수 없으나 추정해보면 1차 복원시기부터 변형의 가능성은 크다고 본다.

누각 하부 벽체에 문양이 있는데 창건시기와 지금의 문양이 다른데 변화과정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발견되고 있다. 이 부분은 다음 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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