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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슬칼럼]진실과 거짓의 미로

 

 

 

“음흉한 의도를 지닌 지루한 논쟁처럼 이어진 거리들”

사도세자의 정실이며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가 새삼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어머니에 대한 정조의 효심의 근원과,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혜경궁 홍씨에게 던지는 의심의 눈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인간 존재와 인간의 관점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혜경궁 홍씨의 이미지에는 분명 복합적인 함의가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혜경궁 김씨인가? 최근 혜경궁 김씨의 정체와 관련한 주장과 해명은 말의 미로를 헤매고 있는 것 같다. 미셸 푸코 등의 철학자들은 언어란 본질적으로 진리를 배반한다고 생각하여 기본적으로 말을 불신한다. 말이 본질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질을 설명하고 해명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지만 말을 하는 순간 본질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언어의 이중성이 있다. 혜경궁 김씨의 정체를 밝히려는 과정은 푸코의 말을 증명하는 과정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말이 길어질수록 본질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진리나 본질은 말이나 글로 전할 수 없다는 불립문자의 의미가 그것이다. T.S. 엘리엇(Eliot)은 일찍이 언어가 본질을 재현해낼 수 있는가의 문제에 천착했다.



그러면 우리 갑시다, 그대와 나,

저녁이 수술대위에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을 때.

우리 갑시다, 반쯤 인적 드문 거리를 지나,

싸구려 일박 호텔에서의 불안한 밤에

수군거리는 뒷골목과

굴 껍질 흩어져 있는 톱밥 깔린 식당을 지나.

음흉한 의도를 지닌

지루한 논쟁처럼 이어진 거리들을 지나면

결국 압도적인 문제에 이르게 되겠지요.

아, 하지만 “그게 뭐냐”고 묻지는 마세요.

우리 가서 방문합시다.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사랑노래’ 첫 부분



이 작품은 현대인의 특징 중 하나인 내면화된 자아의 분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자는 ‘너’와 ‘나’라는 객관적 자아와 주관적 자아로 분리되어 어딘가로 떠나자고 제안한다. 양자는 속성상 끊임없이 대결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명징한 의식을 상징하는 낮으로부터 무의식의 밤으로 향하는 저녁에 출발하려 한다는 점에서 여정이 순조롭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저녁은 화자의 정신의 환유이다. 마취된 환자에 비유된 저녁이 환기하듯이 화자의 정신 역시 마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길들은 불안한 밤, 수군거림 가득한 불안한 뒷골목이다. 어쩌면 그 길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끝없는 미로처럼 이어져 있는 길들인 공간적 개념을 ‘음흉한 의도’를 지닌 ‘지루한 논쟁’이라는 추상적 비유로 말하는 시인의 기술이 놀라운 시적 효과를 거둔다. 여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화자는 ‘압도적인 질문’이라고 말하며 그게 무엇인지는 묻지도 말라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화자가 직시하기를 두려워하는 진실이거나 대면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인간은 진실을 마주하거나 진정한 자신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법이어서 가능한 한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이를 회피하려 한다.

지루한 변명이나 해명은 본질을 벗어난 알맹이 없는 말잔치일 뿐 그러한 논쟁으로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 결미에서 화자는 백일몽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다.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진실과 만날 수 없다.

최근 혜경궁 김씨의 공허한 논쟁 역시 길어질수록 본질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엘리엇의 화자처럼 분연히 깨어날 때 비로소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사건의 실체가 무엇이건 국민 모두 소모적인 말의 미로에서 벗어나 진실에 이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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