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희의 미술이야기]마티스의 ‘콜리우르의 프랑스 식 창문’
[정윤희의 미술이야기]마티스의 ‘콜리우르의 프랑스 식 창문’
  • 경기신문
  • 승인 2019.01.1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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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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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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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길게 나 있는 창밖으로 묘한 어둠이 깔려 있다. 막다른 골목처럼 굳게 닫힌 벽처럼 답답하게 느껴지다가도,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적막감과 황량함이 밀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1914년 작 ‘콜리우르의 프랑스 식 창문’은 앙리 마티스가 전 인생에 걸쳐 완성한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매우 눈에 띄는 작품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 색채의 향연을 즐겨오던 그의 성향과 매우 대비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현란한 원색으로 가득한 여느 작품들과 달리 ‘콜리우르의 프랑스 식 창문’에서는 칠흑 같은 어둠과 칙칙한 몇 가지 색들이 쓰였을 뿐이다.

이 작품에는 제1차 세계대전을 목도하고 있는 작가의 답답한 심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조국을 위해 입대를 자원했다가 나이 때문에 거절당한 후 그는 동료들이 떠난 도시에 외롭게 남아 있었다. 입대를 하지 않은데다가 외국인과 두터운 친분을 지니고 있었던 마티스를 향해 평단의 반응은 점점 더 날카로워져만 갔다. 전시의 상황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 자체를 고깝게 여기는 시선도 있었다. 평론가들의 혹평 외에도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또 하나의 고민이 있었는데, 그동안 일구었던 화가로서의 영예와 성공에도 불구하고 작가로서 표현의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던 것이다.

어둡고 쓸쓸한 색조의 회화 작업들은 몇 년간 지속된다. 같은 해에 완성한 ‘금붕어와 팔레트’에서도 어두운 색조로 창가가 그려졌고, 테이블 위에는 작은 어항이 놓여 있으며, 그 안에는 물고기 두 마리가 제 자리를 빙빙 맴돌고 있다. 어항에 갇힌 물고기는 전시의 상황에서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작가의 답답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다.

1916년에 완성한 ‘피아노 교습’에서도 암울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피아노 교습을 받고 있는 마티스의 큰 아들은 아무 표정도 감흥도 없이 경직된 모습이고, 아이를 감시하고 있는 두 명의 여인 역시 생기 없는 딱딱한 형체로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작품들을 그저 절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마티스는 이들 작품을 통해 중요한 실험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실험실에서 중대한 실험을 마친 후 그는 금세 돌파구를 찾아 새로운 회화의 세계를 향해 튀어오를 예정이었으며, 화려했던 이전의 색채도 곧 회복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몇 가지 중요한 과제를 치러야만 했다.

아수파 화가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해온 후 마티스의 작품에서는 원색들이 가진 강렬함이 그대로 살아나서 색들은 캔버스 안에서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찬연하고 충만한 느낌을 주었지만 뼈대를 잃은 것 마냥 무너지고 흘러내릴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동안 입체파에 반감을 표시해왔던 마티스였지만 이제부터는 입체파의 개념을 일부 수용하기로 했다. 마침 파리에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똑같이 입대를 거절당했던 피카소가 남아있었으며 자연스럽게 둘의 관계는 돈독해져 갔다. 입체파를 함께 일궈온 브라크가 입대를 해버리자 피카소에게는 새로운 동지가 필요했고, 마티스에게는 입체파의 개념이 필요했다.

‘콜리우르의 프랑스 식 창문’과 여러 점의 금붕어 어항 연작들은 입체파 작품들에 대한 그의 화답이었다. 그전의 마티스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수직과 수평의 구조를 강조한 면, 그리고 건축적 요소를 배경으로 활용한 점이 눈에 띈다. 하지만 무한대로 대상을 쪼개버리기만 하는 입체파에 대해서는 여전히 선을 긋고 있었으며, 그가 나름으로 발전시켜온 형태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발표하고 있었다. 그는 입체파 화가의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인체도, 대상도, 배경도 새롭게 그리기 시작했다.

피카소 역시 입체파에 대한 마티스의 해석을 일부 수용했으며, 그 결과 어느 정도 간결하게 정돈 된 형태로 대상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1915년 작 ‘어릿광대’는 여러 겹의 납작한 판넬들로 표현된 광대의 형태가 자못 의미심장한 감동을 주어 마티스는 피카소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콜리우르의 프랑스 식 창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칠흑 같은 어둠 위로 희뿌연 안개 같은 게 서려있어 아주 이른 새벽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어둠 속에서 화가는 새로운 세계를 건축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창은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창이었다. 여러분이 만약 이 창문 너머에 존재하고 있다면 그곳에서 무엇을 짓고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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