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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5년(1592)4월 14일, 왜군의 부산진성 공격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은 조(朝)·명(明)·일(日) 3국이 화약병기를 주요 전투 무기로 삼아 벌였던 동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쟁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군은 승자총통(勝字銃筒) 등 십여가지의 화포를 가지고 있었지만 일본의 화기인 조총(鳥銃)은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은 파죽지세로 나라 안을 유린하고 있는데도 조선군은 무기와 전술의 열세 때문에 연전 연패를 거듭했다. 의주까지 쫓겨간 선조는 전세를 만회하는데도 조총을 만드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하게 되는데 이 때 조총 제작 기술을 가르쳐 준 사람이 명나라 백총(百總) 주(周) 아무개였다.
한 쪽에선 전쟁을 하면서 다른 한 쪽에서는 조총 생산을 했으니, 전쟁이 얼마나 어려웠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조총 제조 기술을 배웠다 하더라도 재료 수급과 재정확보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선조 27년(1594) 3월 강원도 관찰사 윤승길의 작보는 당시의 정황을 엿보게 한다.
“포수(砲手)를 교환할 숫자가 큰 고을은 200명, 중간 고을은 100명, 작은 고을은 50명으로 대략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 숫자를 비록 일시에 갑자기 충당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10명을 모집하면 조총 10자루가, 100명이면 100 자루가 있어야 하는데 본 도에는 지금 단 한 자루도 없다고 하니 기계를 준비하는 동안은 포수의 조련이 지연 될 것입니다.”
오늘날 60만 대군을 자랑하는 국군은 최첨단 무기로 무장하고 군사력 또한 세계 수준급이다.
410년 전 조총 한 자루없이 왜군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조상 앞에 고객 숙일 일이다.
이창식/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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