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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뜨락]깨달음과 면벽수양(面壁修養)

 

 

남북조시대에는 불교가 흥성하였으며 당시 많은 인도의 승려들이 중국으로 도래했다. 양나라 무제 시절 남인도 향지왕(香至王)의 셋째 왕자인 달마도 광동지방을 거쳐 양나라의 수도인 건업을 지나 북위의 영토인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무른다. 그때부터 달마는 토굴에서 죽을 때까지 꼬박 9년 동안 벽을 마주보고 앉아 말 한 마디 없이 수행했다고 한다.

면벽이좌(面壁而坐) 종일묵연(終日默然) 자기 마음을 바로 보아 그 근본을 찾으려고 벽을 향해 오랫동안 홀로 좌선을 하는 것과 부지런히 연구하여 학문의 조예가 깊어지도록 하는 말로 뜻하는 바가 폭 넓다. 면벽공심(面壁攻深) 면벽수양(面壁修養)이라고도 하는데, 나아가 ‘할 일 없이 벽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거나 ‘어처구니가 없어 벽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는 뜻으로도 쓰이게 됐다.

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용어의 이해가 바로 벽관이라고 할 수 있다. 벽관은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되는 선사상의 핵심요체라 할 수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선의 방향이 결정된다고도 한다.

송대의 종감(宗鑑)이 저술한 ‘석문정통(釋門正統)’에 의하면 벽관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이와같이 마음을 안정(如是安心)함이란 벽관을 말하니, 객진위망(客塵僞妄)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라한다. “마치 가옥 외벽이 외부의 풍진을 방지하는 것과 같이 객진위망을 근접시키지 않는 마음의 긴장, 그것이 곧 벽관이다.”

여기에서 객진이란 밖에서 오는 오염이다. 위망이란 작위적인 것을 말하며 마치 거울을 덮은 먼지와 같은것이 객진위망이다. 벽관은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설명한다면 객진위망이 달라붙지 않는 내면적인 마음의 긴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글자 그대로 벽관을 해석할 경우 마음의 긴장상태는 없을 것이다. 즉 벽관은 ‘벽을 본다’가 아니다. 요컨대 ‘벽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벽이 되어 보는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 공(空)을 관(觀)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공을 지켜보는 것이다.

선종의 초조 달마가 벽관의 기초를 닦아 놓았으며 북위의 한 동굴 속에서 좌선삼매에 들었으니 이를 ‘면벽정진’이라고 일컫는것이며 그러하기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면벽은 외부세계와의 단절이 아니다. 달마의 면벽도 벽과 하나되어 자기와 세계를 관하고 있었으며 거기에서 그는 ‘범성일체(凡聖一體)’의 진실을 보았고 그렇기에 벽관은 ‘회광반조(廻光反照)’의 뜻을 품고 있다.

석양이든 거울이든 모든 것을 반조하는 불가사의한 작용을 벽관은 지니고 있다. 선의 출발은 이러한 벽관에 기인하며 따라서 더욱 큰 매력인것이다.

달마는 그렇게 면벽 수도하다 입적하였을 테고, 소림의 서쪽에 석벽이 있으니 얼핏 보면 보통 돌 같지만 몇 걸음 물러나서 보면 달마가 정좌한 모습이나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난다고 하니 후세의 사람들은 이를 신비롭게 여겨 달마가 면벽하여 도를 닦아 남긴 흔적이라고 하니 달마는 신화를 남긴것이며 오랜 고행과 수도를 통하여 깊은 경지에 이름을 비유하는 말이 면벽공심(面壁攻深), 면벽수양(面壁修養)이라는 말이렸다. 내면세계(內面世界)에 깊이 침잠(沈潛) 하여야 확철대오(廓撤大悟)의 길이 보이는 것이 분명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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