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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n쉼]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서

 

작가에게 역사의식은 작품 제작의 근본적인 철학이 된다.

작품으로 보여지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속에는 잠재된 무엇인가 엄청난 덩어리가 숨겨져 있다. 특히 어린시절부터 쌓아온 남들은 모르는 그 무엇이 폭발적 에너지처럼 잠재 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표현 되어 진다.

중국어와 일본어가 유창한 군인이었던 아버지와의 저녁식사는 역사공부 시간이었다. 세상은 성공한 자만을 기억하는 것처럼, 중간에 군생활을 예편한 아버지는 계속 세상과의 불협화음을 가지는 것처럼 어린눈에도 비쳐졌다. 엄했지만 자식들을 한없이 사랑한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실 때, 감수성 예민했던 단발머리 여고생은 마음속으로 끝까지 살아 남으리라 결심했다.

너무나 바쁜 일상속에서 수십년간 마음에 두었던 일을 실행 해보라 결심한 것은, 올해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도 했다. 중국에 있는 군관학교를 다니다가 한국군에 입대 했다고 말한 아버지 말씀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간 이유도 일제 강점기에 선교사와 함께 할아버지가 홀로 중국으로 가셔서 찾아 갔다고 했다. 전주 효자동 인동 장씨 집안 아들로 천석꾼 재산가가 파락호가 되어 모든 가산을 탕진한 할아버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 하다. 독립자금을 대기 위함이라는 말도 있으나, 이는 증명할 자료가 없다. 다만 유일하게 생존했던 할아버지의 막내 여동생 전주 고모할머니의 구술이 전부 일뿐이다.

대한민국에 슬픈 역사가 있는 집안이 어찌 우리만 있을까.

매헌 윤봉길의사가 1932년 폭탄을 투척한 상해 홍구공원으로 가는 아침에는 비가 내렸다.

슬프고 감사한 마음으로 ‘장부출가생불환’ 이란 유서와 중국 칭다오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일층 더 강의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다.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 간다’ 글과 함께 한인애국단의 김구선생님과의 작별을 마음속 깊이 담아 한국으로 가져 왔다.

상해 신천지 오래된 건물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 프랑스조계에서 수립됐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후 일제의 식민지배를 부정하고 한민족의 독립국으로 세운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상해임시정부, 한성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회의, 미국의 국민회와 동지회가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한민족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길가에 위치한 1층 조그만 건물벽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새겨져 있고, 그안에는 임정시절 사진과 비디오가 돌아 간다. 옆 골목으로 가면 작은 건물 1층과 2층에는 내부에 이동녕 선생님등 주요 인사들의 사진과 태극기등 유물이 전시 되어 있고. 김구선생님 집무실과 각 부처의 집무실등이 재현 되어 있다.

한사람도 올라가기 힘든 가파르고 좁은 계단과 여러사람이 숙식을 함께 하는 여러 침상이 놓여 있는 작은 방들은 임정요인들의 치열 했던 독립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세워진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침체에 빠진 상해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의사 의거 이후 중국의 장제스는 김구선생님께 만남을 요청 한후 군대 창설을 지원 한다. 하지만 일본군을 피해 임시정부는 중국 6개 도시(상하이-항저우-전장-난징-자싱-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구이린)를 유랑 하다가 1940년 충칭에 안착후 1945년 급작스런 해방을 맞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임시정부는 해산 되었다.

엄청난 발전의 속도를 이루고 있는 상해와 항저우를 다니며 내내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아직도 우리 모두의 지워지지 않은 화인 같은 상처가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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