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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松시선]일본을 아십니까?

 

“조선의 보물은 무엇이오?”

“조선의 보물은 조선에 없고 일본에 있소”

“무슨 말이오?”

“장군에게 큰 상금이 붙었으니 장군의 목이 조선이 보물인 셈이오”

일본과 협상에 나선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와 나눈 대화라고 전해지는 것이다.

우리 보물이 일본에 아주 많다. 신비로운 칠지도와 화려하고 정교한 바둑판,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목조반가사유상 같은 유물은 천수백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보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저들과 문화를 교류하면서 선물한 것이니 뭐라 시비할 수 없다. 우리가 탄식하고 분노하는 것은 정창원을 비롯해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의 대부분은 저들이 약탈해 간 것이라는 사실이다.

넋을 빼앗을 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운 고려 탱화의 대부분을 일본 절에서 소장하고 있다. 고려 말 왜구들의 약탈은 상상 이상으로 망국의 원인을 왜구들의 침략 탓으로 돌려도 지나치지 않다. 태종의 결단으로 대마도 정벌이 이뤄졌다. 이때만 해도 일본 사신들이 한양을 자주 들락거렸다. 일본 사신들이 세종에게 대장경판을 달라고 집요하게 요청하자 세종이 신하들에게 대장경판을 저들에게 주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물었다. 신하들이 버릇된다며 반대했기에 망정이지 팔만대장경판조차 일본이 차지했을 뻔 했던 것이다.

알려진 것처럼 일본은 임진왜란 때 특별부대를 편성해 조선의 수많은 도공을 납치해 갔다. 끌려간 도공들이 일본의 도자산업을 부흥시켜 조선보다 기술이 앞서게 됐다. 뿐만 아니라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이 근대화에 투입한 자원이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해서 벌어들인 돈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가슴이 아리다.

임진왜란으로 단절됐던 외교를 1607년에 재개하며 두모포에 왜관이 설치됐다. 그러나 일본은 두모포 왜관이 좁고 불편하니 넓고 좋은 곳으로 이전해 달라며 끈질긴 교섭 끝에 1678년 완성된 10배나 넓은 초량 왜관을 확보했다. 이후 일본인들은 약효가 아주 뛰어난조선 인삼에 눈독을 들였다. 왜관의 관리들이 은밀하게 조선의 심마니를 거액으로 매수해 줄기와 잎이 살아 있는 생삼을 몰래 일본에 가져가 재배하는데 성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 인삼의 수출이 크게 줄어들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유출을 금지한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도 비밀리에 입수해 1695년에 교토에서 출판했다. 왜관은 일본 첩자들로 우글거렸다. 이들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 식물도감까지 만들었다.

물론 조선에도 일본이 무서운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고 주의할 것을 경고했던 관료가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습성이 굳세고 사나우며, 칼과 창을 능숙하게 쓰고 배를 부리는 데도 익숙합니다. 우리나라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들을 법도에 맞게 진무하면 예를 갖추어 조빙하지만, 법도에 어긋나게 하면 곧 방자하게 노략질을 합니다”

1443년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세종에게 올린 책 ‘해동제국기’의 한 구절이다. 그러나 조선의 왕과 관료들은 이러한 경고를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일본에서 100년 동안 내전이 벌어졌으나 전쟁의 원인과 결과에 주목한 조선의 학자는 없었다.

1763년 통신사로 에도(도쿄)에 간 선비(김인겸, 성대중, 원중거)들이 일본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사들고 귀국했다. 권력에서 소외된 서얼 출신인 이들 세 사람만 조선보다 번영을 누리는 일본의 현실을 직시했던 것이다. 세 사람은 귀국한 후 모두 일본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원중거의 ‘화국지’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 지리를 아우른 채으로 북학파 학자들 일부만 읽었을 뿐 잘난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했다. 100년 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할 때까지 일본을 연구하는 조선의 학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21세기에도 일본에 대한 한국 지식인의 무지와 무관심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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