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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문화칼럼]한국영화 100년 ‘아리랑’

 

 

 

1926년 단성사에서 상영한 ‘아리랑’은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한국 관객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 영화였다. 이 영화로 감독 데뷔한 나운규는 민족영화 감독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며 대중적 명성을 얻었다.

‘항일’이란 용어를 들어내놓고 말 못하던 그 시절, 검열을 의식해 가며 만든 민족영화 ‘아리랑’은 많은 부분이 삭제된 후 공개된다. 당시 한국 옷을 입은 한국사람만 나와도 환호하던 관객들에게 나운규는 더 큰 호응을 받을 수 있는 영화가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아리랑’을 만들어 민족적인 감동까지 이끌어 낸 최초의 감독이다.

‘아리랑’은 민족영화로 일컬어지는데 그것은 한국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서의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즉 민족영화의 전제 조건은 한국사람의 이야기를 한국사람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영화라는 개념은 이렇듯 다분히 자국의 전통적 사상까지를 포함하는 범위로 좁혀진다. 지금 ‘아리랑’은 필름이 분실돼 볼 수가 없고 다만 문헌 자료를 통해 영화를 유추해볼 뿐이다.

‘아리랑’은 항일영화로 볼 수 없지만 다분히 항일성을 상징한 대립요소의 드라마 트루기를 갖고 있으며 은유적으로 표현된 영상의 표현이 일제강점기 핍박받는 한국인들의 환영을 받는 요소로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실성한 영진이가 순사의 따귀를 때리거나 마름인 기호와 맞서며 지주계급의 횡포를 고발하는 장면, 그리고 환상 속에 민족적 염원의 희구하는 장면들은 나라 잃은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아리랑’은 총독부 검열에서 상당 부분이 삭제돼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이후 한국영화인들은 강화된 검열을 받아야 하는 일제 치하에서 제작의 한계성에 직면해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상황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항일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현실인식은 일단의 영화인들을 상하이로 진출케 한 동기를 제공했다.

‘아리랑’은 항일영화의 제작을 촉진시켰고 ‘애국혼’과 같은 항일영화가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가 광복 후 우미관에서 상영됐다고 나운규 감독의 아들 나봉한 감독은 증언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시기에 분실돼 지금 이 영화를 본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1990년대까지 활동했던 동양화가 고 이남호 화백을 인터뷰 하며 버릇처럼 이 영화를 보셨는가 질문했다. 이남호 화백은 “영화는 물론 촬영 현장도 보았다”며 형인 이명호 배우가 출연하기에 서울 돈암동의 아리랑 고개 넘어 초가집으로 구경을 갔었다고 한다.

당시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을 받을 줄 알았으면 잘 보아둘 것이라며 당시 상황을 들려주었다. 내가 이 영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과연 ‘아리랑’의 감독이 나운규가 맞는가? 때문이다. 당시 일본인 감독설이 대두됐기 때문인데 이 화백은 “나운규가 낫 들고 사람들에게 아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것 보았다”며 나운규 감독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현장에서 사람들을 지휘하는 이는 감독임이 분명한데 필름에는 일본인인 쓰모리 히데가츠(津守秀一)의 이름이 대신해 올려졌다. 당시 나운규가 검열을 의식해서인데 역사의 진실은 이렇게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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