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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신발의 힘

 

 

 

겨울맞이 대청소를 하기로 한 날. 거실 곳곳에 흩어진 책들을 집어 책꽂이에 꽂았다. 책상 위 필기도구도 제 자리에 꽂고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몇날 며칠씩 잠식해 오던 거실 먼지들이 한 순간 휩쓸려 들어가고 제법 집안 꼴을 한 공간마다의 바닥이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현관 앞 지그재그로 널브러진 신발의 짝들을 찾고 묵은 계절의 신발을 정리하기로 했다. 한 계절 닫혀있었던 신발장 문을 열어젖히자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신발마다의 추억들.

가장 먼저 눈에 띈 미색 트레킹화. 스물다섯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올랐던 백두산. 고구려의 정기를 듬뿍 받아오겠다며 떠났던 그 일정에서 우리는 안중근 열사의 뜨거운 애국심과 지금은 우리 땅이 아니라는 안타까움으로 얼룩덜룩해진 자존심을 안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비 오는 와중에 올랐던 오녀산성의 질퍽거리던 진흙의 흔적이 그대로 신발에 남아 추억을 퍼내어주다니. 지난 시간은 그렇게 현재의 흔적에서 문득 문득 나타나기도 한다.

맨 아래 칸, 빨간 등산화가 눈에 들어왔다.

‘아, 태백산 눈꽃?’

눈이 참 많았던 그 해 겨울, 속절없이 내리는 눈을 감당할 수 없어 달려간 곳이 태백산. 복잡한 생각 없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결국엔 아이젠도 무용지물인 채 푹푹 빠지는 눈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는 그만 눈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허리까지 찬 눈 속에 파묻혀 발버둥 치고 있자니 손을 내밀었던 사람. 그들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가끔 운동할 때 마주치곤 했던 부부였다.

‘아니, 이렇게 먼 곳에서 이웃을 만나다니?’

반가움과 고마움과 의아함에 놀랐던 마음은 내려오는 길에 비닐포대자루 눈썰매를 함께 타며 다 풀어냈던 것 같다. 그 때 신었던 그 빨간 등산화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불쑥 손을 넣어 신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 신발 바닥이 우수수 부서지고 말았다. 겨우 꺼내놓고 보니 신발이 삭아서 온전한 형태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추억도 청춘도 저 신발처럼 시간이 지나면 꼴이든 생각이든 달라지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허전한 마음에 올려다 본 구석진 자리, 색 바랜 샌들 하나가 구부정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아, 내가 사랑하는 정화!’

몇 년 전 여름 대구로의 기차여행. 학창시절을 함께 했던 도시, 그리고 둘 도 없는 친구를 만나러가는 시간이 마냥 행복했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시집을 꺼내 들쑥날쑥 읽어가다가도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두기도 하며 흥분된 마음을 달랬던 것 같다. 마침내 동대구역에 도착하여 기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아, 신고 있던 샌들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 손에 신발을 들고 맨발로 역구내를 나올 때까지 모든 시선이 내게로 향해 있는 것 같고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전화를 받고 친구가 급하게 사 온 샌들. 그 샌들이 아직도 신발장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꽁꽁 숨어있던 추억도 거침없이 소환해내는 신발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 아침, 대청소를 하다말고 매일 신고 벗는 내 소박한 신발의 힘을 생각한다. 제 생명을 다해 기능을 잃거나, 싫증이 나서 파트너가 버릴 때까지 곁을 지킬 줄 아는 신발. 이속 먼저 따지는 요즘엔 좀처럼 찾기 힘든 그런 파트너가 어디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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