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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화가에게 모델이 되어주었던 부모들

 

 

 

화가가 그들의 모습을 그리는 동안 꽤 묘한 기류가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자식이 화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부모였지만 모델이 되어 달라는 자식의 요청에 응하며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 폴 세잔이 <화가의 아버지, 루이-오퀴스트의 초상>을 그렸던 것은 1866년의 일이었고 그림에 입문한지 몇 년 뒤였다. 성공한 자산가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지만 아들은 결국 화가가 되었다. 모델에게 미동도 하지 말고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주문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세잔이었으니, 나이 든 아버지로서는 그림이 완성되는 동안 포즈를 취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잦은 말싸움을 벌였을지도 모르겠다.

세잔이 겪었던 아버지와의 갈등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이 작품은 아버지를 향한 반항심을 드러낸 작품으로 해석되곤 한다. 특히 아버지가 들고 있는 신문의 이름이 자주 회자된다. 보수 성향이 강했던 세잔의 아버지가 즐겨 읽던 신문이 아닌 진보 성향의 신문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신문의 이름쯤이야 모델 없이도 화가 혼자서 얼마든지 그릴 수 있었을 테니, 세잔의 아버지는 출품이 될 때까지도 자신이 들고 있는 신문의 이름이 잘못 적혀 있었는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찌 되었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어르신의 모습이 꽤나 다정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청바지에 코르덴 재킷을 입고 투박한 워커를 신고 있는 멋쟁이 중년의 모습이다. 물론 대중적으로 청바지가 등장하기 전이었을뿐더러, 화가가 의도적으로 신발을 투박하고 크게 그렸다고 하니, 이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감상이다. 다리를 포개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구도가 탁월하다. 의자가 모델에게 밀려나갈 듯 인물은 운동감을 지니고 있지만 또한 인물을 그리고 있는 굵고 강직한 선은 묘한 안정감을 준다. 아버지의 얼굴을 확대해 보면 모델이 머금고 있는 옅은 미소를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가 있었지만 서로에게 지니고 있었던 깊은 애정만큼은 감추어지지 않는다.

제임스 휘슬러도 1971년 어머니의 초상을 그렸다. 애틋한 모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대중에게 자주 회자되는 작품이다. 화면의 큰 부분을 차지하며 부드럽게 떨어지는 어머니의 검정 드레스가 매우 인상적이다. 화면 전체가 차분한 흑백 톤이다. 하지만 단지 어머니의 사랑이 느껴진다 하기에는 뭔가 냉소적인 분위기가 감돈다. 의자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어머니의 표정과 맞잡은 두 손은 경직되어 있는 어머니의 심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화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회색과 검은색의 배치>라고 지었다. ‘회색과 검은색이 배치’라는 글귀가 본능적으로 작품에서 모성을 먼저 찾으려는 대중들의 심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휘슬러는 미국 출신이었지만 어머니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 화가들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고 이 작품이 완성될 당시에는 런던에서 머물고 있었다. 보수적인 화단은 전위적인 젊은 화가들에게 불친절했고 색이 이처럼 대담하고 평평하게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휘슬러는 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펼쳤다. ‘보라와 녹색의 변주’, 밝은 분홍과 검정의 편곡‘ 등과 같은 문구를 대담하게 작품 제목에 넣었다. 이들 작품이 모두 휘슬러 만의 잔잔한 서정성을 띠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한때 아들의 성공 가도를 원했던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화가가 되어버린 아들에게 다소 복잡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병들고 지쳐 오래 서있을 수 없었기에 앉은 자세를 취하게 되었고, 작품이 완성되고 2년 뒤에 돌아가셨다. 화가가 캔버스에 담은 부모님의 모습은 넓은 세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지만 관객들마저도 그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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