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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의 시시비비]‘증세’ 선언, 지금이 골든타임

 

 

 

“새누리당의 대선 공약이었던 134조 원의 공약 가계부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는 점을 반성한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임이 입증되고 있다” 2015년 4월 8일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울려 퍼진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은 이 나라 정치사에 새로운 변곡점을 잉태한 역사적 장면이었다.

유 원내대표는 나아가 “현재 우리의 복지는 ‘저부담-저복지’여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체의 붕괴를 막기에 크게 부족하다”고 진단하고 “국내총생산(GDP)에서 국민 부담과 복지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수준이 되는 것을 장기 목표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연설이 끝나자 야당 의석에서도 많은 박수가 나왔다. 현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 있는 새정치민주연합 유은혜 대변인은 “우리나라의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 명연설”이라고 이례적인 호평을 내놨다. 그러나 그날의 연설이 유승민의 운명을 가르고, 나아가 박근혜 정권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분기점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유승민은 그날 ‘진실’을 말한 죗값을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정책전환의 도구로 활용해야 할 원내대표 유승민에게 터무니없는 ‘배신자’ 프레임을 뒤집어씌웠고, 집권 여당은 갈가리 찢어졌다. 낡은 의식과 협애하기 짝이 없는 아량으로 국정을 잘못 다룬 박근혜식 정치는 그때 천박한 바닥을 다 드러냈다. 유승민은 정치무대에서 무너졌지만, 박근혜는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고 말았다.

‘세금 인상’은 지금도 정치인들이 입줄에 올리기 가장 두려워하는 금기어(禁忌語)다. 정치인들은 ‘증세론’을 말하는 순간 정치 생명이 끝난다고 생각한다. 유권자들 역시 ‘증세’를 말하는 정치인을 용인할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못하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어느 때부터인가 유권자들의 표심을 훔칠 고단위 마약으로 ‘공짜복지’ 카드를 마구 써먹기 시작했다.

먼저 시작한 쪽은 진보세력이다. 학생들의 ‘무료급식’ 이슈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자살골’을 불러올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결국, 국민 정서의 흐름을 간파한 보수세력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슬금슬금 따라가더니 한술 더 떠서 ‘무료보육’까지 과감하게 내걸어 승세를 일궈냈다.

밑 빠진 독처럼 난감해질 곳간을 어찌할 거냐는 물음에 보수정당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하경제 활성화(?) 같은 엉터리 개념으로 못 거둔 세금을 낱낱이 찾아 받아내면 된다고 강변했다. 진보정당은 유일한 특효약으로 ‘부자 감세 철회’, ‘부자증세’만 들이댄다. 도대체 정치권의 계산기는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판판이 그렇게 엉터리 계산만을 하느냐는 핀잔이 넘쳐났다.

‘복지 확대’를 주창하는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노르웨이,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을 모델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 나라들의 복지를 담보하는 높은 국민 담세율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을 하지 않는다. 스웨덴의 조세수입은 GDP의 45.8%다. 과거 경기 침체가 극심했을 때는 세금 비율이 75%에 육박한 때도 있었다.

이제 이 나라 정치인들이 새빨간 거짓말을 멈추고, ‘증세 있는 복지’를 커밍아웃할 시간이 왔다. 코로나19라는 희대의 재앙이 우리를 깊은 ‘공짜 점심’의 몽상에서 깨어나게 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8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GDP 대비 조세부담률은 26.9%로 36개 나라 중 32위다. 우리보다 세금을 덜 걷는 OECD 국가는 터키·아일랜드·칠레·멕시코밖에 없다. 미국의 조세부담률도 27.1%로 우리보다 높다. 당연히 우리의 부담률은 OECD 평균(34.2%)에 한참 못 미친다.

국가채무 비율 50%를 마지노선으로 잡고 국민을 상대로 ‘증세’를 설득하자는 제안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대통령과 집권당은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고, 각종 선거에서 연전연패해온 제1야당도 ‘혁신’의 터널을 막 지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국가가 국민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는 ‘보험 국가론’을 정립할 시간이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더욱 높여야 함은 물론이다. 2009년 7월 스톡홀롬에서 취재 중 만난 스웨덴 국회의사당 관계자에게 국민이 높은 세금을 기꺼이 감당해주는 비결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는 정부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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