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풀타임’이 평화로운 건 오프닝 타이틀이 흐르는 딱 1분 반 동안만이다. 어둠 속에 얕은 숨소리가 들리고 ‘저게 뭘까’하는 순간, 여주인공 쥘리(로르 칼리미)의 얼굴 윤곽을 카메라가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아주 느리게 따라 보여 주는 장면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 순간 알람이 울린다. 해가 떠오르려면 한참이 남은, 여전히 심야인 시간에 쥘리는 간신히 눈을 뜬다. 억지로 일어난다. 잠들어 있는 딸과 아들아이를 역시 억지로 깨우고, 밥을 먹이고, 옷을 입혀, 이웃에서 홀로 살아가는 나이 든 여자에게 데려다준다. 거기까지가 영화의 3분이다. 이때부터 쥘리는 줄곧 냅다 뛰기 시작한다. 파리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차는 파업으로 중간에 끊어진다. 쥘리는 발을 동동 구르다 대체 버스를 타서 일정 구간을 이동한 후에 다시 열차로 갈아타고, 내려서는 다시 뛴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5성급 호텔까지 제시간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쥘리는 호텔에서 일하는 메이드이다. 쥘리는 오늘도 지각을 할 판이다. 영화 ‘풀타임’은 격렬한 영화다. 88분의 상영 시간 동안 관객들은 주인공 쥘리와 함께 숨이 차오른다. 삶이 막바지까지 내몰리는 느낌을 받는다. 인생이
요즘 쓰는 글에 오자와 탈자, 비문이 많아져 걱정이다. 이게 다 의존증 때문인데 한창 글을 쓸 때 편집국 혹은 편집부에 교열부가 존재했었고 내가 잘못 쓰면 한번 걸러주겠지 하는 생각에 길들여져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인터넷 시대인 요즘엔 교열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상당수 언론사에서도 교열부나 교정부를 없앴을 가능성이 높다. 교열기자에 대한 기억과 로망은 이병주의 소설 『행복어사전』에 나오는 주인공 서재필 정도에 머물 것이다. 이런 얘기도 젊은 기자나 글 쓰는 사람들에게 공룡시대 취급을 받을 것이다. 되려 이병주가 누구냐, 혹시 삼성 창업주 이병철 이름을 잘못 쓴 거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어쨌든 이 칼럼에도 늘 상당수 오자가 있는데 조사의 ‘은는이가’가 잘못 붙어 있는 경우는 다반사요, 고유명사나 이름을 틀리는 경우까지 있다. 띄어쓰기의 잘못은 물론이다. 온라인 판에서는 스스로 발견하거나 독자의 지적을 받거나 해서 바로 수정을 하지만 지면 판에서는 이미 윤전기에서 돌아간 후라 고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날은 마치 밥을 먹은 후 뭐가 얹힌 듯 하루 종일 찝찝하게 지낸다. 창피하고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다. 숱한 오자에도 불구하고 ‘2틀’이나 ‘4흘’ 같은
눈이 밝은 관객이라면 영화 ‘임파서블 러브’ 속 남자 필립(닐 슈나이더)이 여주인공 라쉘(비르지니 에피라)에게 니체 얘기를 할 때 알아 봤을 것이다. 필립은 라쉘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 봐. 없으면 내가 갖다 줄게.” 필립은 모르는 것이 없다. 외국어도 몇 가지를 하는지 모를 정도다. 그는 통역과 번역 일을 한다는데, 심지어 중국어까지 구사한다. 키가 크고 잘생겼다. 25살의 노처녀(1950년대 당시)인 라쉘은 그런 그에게 홀딱 빠져 든다. 그런데 문제는 조로아스터, 곧 자라투스트라이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 사상에 빠져 있는 이 젊은이는 전통과 권위의 기존 질서를 깨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자신의 여자, 자신의 연애관계에까지 적용하려 한다. 게다가 니체 사상의 핵심은 초인 사상이다. 그건 한때 히틀러가 ‘애용’하던 것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척, 그리고 기독교적 관습과 윤리의식을 깨부수는 척, 또 다른 폭력적 권위의 질서를 만들어 내려했던 히틀러처럼 필립은 모든 사물과, 모든 연애의 감정과, 모든 여자의 순애보적 감성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착취하려 한다. 이건 결국 한 여자의 삶을 짓밟는 쪽으로 나아간다. 니체와
넷플릭스가 이러면 안 된다. 최근 공개된 첩보 액션 영화(?) ‘카터’를 보고 나서 든 생각이다. 이건 자본의 오염이자 자본의 바이러스다. 물경 백수십억 가까이 들인 영화를 이렇게 ‘생각 없이’ 기획하고 ‘밀어주면’ 한국 상업영화계가 오염된다. 그 바이러스는 마치 코로나19처럼 오래간다. 여러 감독, 여러 제작자들에게 제작비의 수위를 ‘맛 들이게’ 해 30억짜리 영화, 심지어 100억짜리 영화도 잘 만들려 하지 않게 된다. 넷플릭스가 한 나라의 영화 제작 환경을 이렇게 습관화시키면 안 된다. 실로 곤란한 일이다. ‘카터’는, 이 영화를 만든 정병길 감독으로서는 매우 아픈 얘기일 수 있으나, 그냥 깔끔하게 얘기해서 망작(亡作)이다. 나는 그가 데뷔작인 ‘우린 액션배우다’를 만들었을 때 높이 평가했었다. 독립영화였다. 스턴트 배우 출신답게 스턴트 액션배우들의 얘기를 잘 다뤘다. 두 번째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의 오프닝 장면, 그러니까 술집 입구 문이 와장창 터지며 벌어지는 액션 신은 영화 초반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정재영, 박시후의 연기도 볼만했다. 복수극의 이야기가 나쁘지 않았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악녀’는 비록 다른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많은 장면을 ‘
개봉 직전이라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으나 영화 ‘헌트’는 올여름 최고의 역작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평론 입장에서 올여름엔 딱 두 편의 영화만을 ‘건졌다’ 할 수 있는데 ‘헤어질 결심’과 ‘헌트’가 그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헤어질 결심’의 미국 영국 배급은 무비(mubi)가 ‘헌트’의 미국 내 배급 역시 유명 배급사가 붙은 것으로 알려졌다. ‘헤어질 결심’은 확실하게 미국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외국어 영화상)과 영국 아카데미 상을 노린다는 것이고, '헌트' 역시 해외시장을 크게 넘보고 있다는 얘기다. ‘헌트’가 개봉되면 작품 자체 얘기도 얘기지만 아무래도 감독 이정재에 대한 얘기로 넘쳐날 것이다. 이미 영화의 공개 시사회 이후 이정재에 쏠리는 기자들의 관심이 매우 높다. 영화를 너무 잘 만들었는데 이게 진짜 이정재의 연출 솜씨냐는 것이고 이정재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느냐,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것은 진짜 이정재가 올곧이 자신만의 실력으로 이번 작품의 연출을 해낸 것이 분명하며 얘기를 해 본 결과 영화를 훌륭하게 만들어 낼 만큼 인문학적 지식과 영화적 소양이 혀를 내두를 수준이라는 것이다. 모두들
한 남자는 무의미한 전쟁을 막으려 하고, 한 남자는 학살의 역사를 끊어내려 한다. 두 사람의 목적은 다른 듯 사실은 같다. 두 남자는 원수지간이지만 알고 보면 동지일 수 있다. 두 남자는 상대가 제5열(국가를 붕괴시키려는 내부 비밀집단)의 수괴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나를 잠입자로 생각하는 걸 나는 알고 있고, 그걸 알고 있는 나를 상대가 알고 있고, 다시 그걸 내가 아는 식이다. 거울 속의 거울과 그 거울 속의 거울 이야기가 바로 ‘헌트’이다. 누가 역사 앞에서 선이고 악인가. 누가 옳고 누가 잘못된 것인가. 동림이라는 이름의 조직 내 두더지는 두 남자 중 누구인가. 혹시 둘 다인가. 아니면 둘 다가 아닌가. 영화 ‘헌트’는 격렬한 하드보일드 액션으로 두 사람의 정체를 향해 냅다 돌진해대기 시작한다. 배우 이정재가 놀랄만한 연출 역량을 선보인 영화 ‘헌트’는 극이 2/3까지 진행될 때만 해도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 둘 중 누가 잠입자인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둘 모두 무슨 음모에 휘말려 있고, 그래서 간첩이 저 중 누구일 거라고 관객 한 사람 한 사람 확신하게 만든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무엇보다 ‘헌트’의 얘기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
일본 니시카와 미와의 신작 ‘멋진 세계’의 로그 라인(스토리의 항해 일지. 전체 스토리를 두세 줄로 요약하는 것)은 이것이다. “13년간 감옥에 복역했던 전직 야쿠자 미카미가 출소한다. 그는 새롭게 살 결심을 하지만 변화된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매번 트러블을 일으킨다.” 로그 라인만으로는 영화가 어째 민망해 보인다. 매우 올드하게 느껴진다. 일종의 갱생(更生) 영화이다. 이런 영화, 1970,80년대에 흔하게 나오던 것들이다. 시작과 끝이 뻔한 내용들이다. 게다가 주인공 미카미(야쿠쇼 코지)는 자꾸 가슴을 움켜잡는다. 협심증이 있는 모양이다. 이것도 어째 끝이 뻔해 보인다. 그러니 이건 물어보나 마나 신파이다. 제목 ‘멋진 세계’가 내포하는 반어(反語)적 의미도 전형성의 대표급이다. 내용은 절대로 멋진 세계를 그리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이 세상이 멋질 일 없다는, 구질구질한 일 투성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처사임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멋진 세계’를 이상한 흡입력으로 종종 훌쩍대다가, 때로는 낄낄 거리며 보게 되는 이유 역시 바로 그 전형적이고 뻔한 신파의 줄거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주인공 역의 야쿠쇼 코지 때문이다. 코지는 미카미의
세상은 늘 한 번에 망가지지 않는다. 서서히 붕괴한다. 그건 마치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주인공 형사 해준(박해일)이 서래라는 이름의 조선족 여인(탕웨이) 때문에 붕괴하는 것과 같다. 붕괴는 물리적인 파괴보다 해준처럼 참담함이라는 정서적 공습으로 다가선다. 붕괴는 간조(干潮)가 끝나고 밀물이 차오를 때 마냥 서서히 스며든다. 지금 우리 사회가 딱 그렇다. 예컨대 1. 이전 정부 때까지 정권의 핵심 공간이었던 청와대를 지금의 정부는 베르사유 궁전처럼 바꿔 관광 장소로 활용하겠다고 한다. 이미 그곳을 버린 자들이지만 공적인 공간을 자기들 멋대로 바꾸겠다고 하는 것이 일단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적어도 공청회 같은 것, 여론을 모으는 척 같은 것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게 누구 발상이고 누구 아이디어인지, 생각한다는 것이 기껏 베르사유라니, 그 상상력에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은 18세기 후반 프랑스 왕정 시대의 가장 화려했던 면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그래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아직 이어지고 있지만, 그건 이 공간이야말로 이중의 역사적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배우 출신의 감독(이란 표현도 일정한 편견이 들어간 것이다. 배우가 연출을 하는 것을 여전히 신기해하는 것인 양 굴면 안 된다) 매기 질렌할이 만든 ‘로스트 도터’는 오프닝 장면 그리고 제목 자체만으로는 이야기 전개를 도통 짐작할 수 없게 하는 영화이다. 이건 공포인가, 살인극인가, 유괴범 이야기인가. 적어도 서스펜스 스릴러 스타일인가. 영화는 그 어느 것도 아니지만, 그 어느 것 모두에 해당하기도 한다. 이야기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다루는 척 하지만, 사실은 인간 마음속의 거친 풍랑을 그려 나간다. 그 격랑의 물결 안에는 살의(殺意)가 있다. 그것도 모성의 살해 욕구. 바로 그 점이 섬뜩하게 만든다. 많은 여자들, 많은 남자들이 마음속을 들킨 것 같고, 그것을 헤집어 놓은 것 같아 못내 찝찝하면서도 겁이 난다. ‘어떻게 알았을까? 사람들이 내 마음속 진심을 어떻게 눈치 챘을까’하는 마음이 된다.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치는(것처럼 묘사되는) 여성 레다(올리비아 콜맨, 젊은 시절 역은 제시 버클리)는 그리스의 외딴 섬에 외따로 여행을 왔다. 일종의 워킹 홀리데이다. 조용한 곳에서 홀로,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연구하고, 쉬고 할 생각이다. 레다는 올해로
1978년 당시 1500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후 4500만 달러를 벌어 들였으니 지금 시가 기준으로 1억 5000만 달러에서 4억 5000만 달러, 즉 우리 돈으로 1700억 원 정도의 돈을 들여 5000억 원 정도의 돈을 번 셈이 되는 것이다. 바로 영화 ‘디어 헌터’ 얘기이고, 이 영화를 만든 마이클 치미노 감독에게는 그 같은 성공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됐던 얘기이다. 이후 여기서 얻은 자신감으로 치미노는 차기작으로 7시간짜리 대작 영화 ‘천국의 문, Heaven’s Gate’을 만들었다. 문제는 이 서부극이 당시로선 천문학적 비용인 3500만 달러가 들었고,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로 마이클 치미노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의 메이저 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UA)까지 파산하고 말았다. 마이클 치미노는 이후 2016년에 사망할 때까지 할리우드에서 기피 인물이 됐고, 끝까지 재기하지 못했지만(미키 루크 주연의 ‘이어 오브 드래곤(1985년)’은 인종차별 논란으로 흥행에서 참패했고, 마이클 치미노와 미키 루크 모두 몰락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의 역작 ‘디어 헌터’는 현대 영화사의 전설로 남아 있게 됐다. ‘디어 헌터’는 베트남전을 다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