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5월 투쟁은 당시 명지대 학생이었던 강경대 열사가 총학생회장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숨지면서 일어난 노태우 정권에 대한 대규모 저항을 일컫는다. 강경태 사망 사건을 통해 노태우 정권의 대한 분노는 1991년 4월 29일 박승희 전남대 학생 분신으로 이어졌다. 1987년 6월 항쟁의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과 겹쳐지면서 국가권력의 야만적 폭력성에 대한 대중적 저항을 이끌어 냈다. 5월 투쟁은 광범위한 민중이 참여한 대중투쟁으로 평가 받는다. 학생·노동자·농민 등 민중들이 전국에서 부문운동 조직을 매개로 단결했다. 이로써 '민중주체의 형성 가능성'을 보였다. 참여자들은 민족자주, 민중권력, 노동자권력, 민중해방 등 구회를 외치며 대안권력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다. 학생인권과 노동기본권 보장으로 인권담론의 지평이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 1991년 4월 ▲ 4.26 = 강경대 명지대 학생 총학생회장 석방 요구 시위 중 경찰 진압에 의해 사망 ▲ 4.27 = '강경태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결성 ▲ 4.29 = 박승희 전남대 학생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중 분신 ◇ 5월 ▲ 5.1 = 김
“내가 가진 것 모두 내어 줄 테니, 노태우 아들 데려오라고 했어요. 두말 않고 돌아가더군요.” 14일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에서 열린 91년 5월 투쟁 30주년 기념전에서 만난 강경대 열사의 아버지 강민조 씨(80)는 강경한 어조로 당시를 떠올렸다. 아들 강경대가 사망한 후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백방으로 뛰던 강민조 씨를 노태우 정권은 다각도로 압박했다. 어느 날은 집으로 찾아와 20억 원을 주겠다며 회유해 좋은 말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랬더니 금액이 적어서인 줄 알았는지, 50억 원을 통장에 넣어주겠다고 또 찾아와 “돈으로 아들을 팔라는 말이냐. 노태우 아들을 데려오면 원하는 것 다 해주겠다”라고 쫓아냈다. 강 씨의 울분은 경대가 못 이룬 꿈, ‘민주주의와 조국통일’을 이루겠다는 의지로 이어졌다. 강민조 씨는 현재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장을 맡아 팔순이 된 지금도 다양한 민주화운동 관련 사업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아들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꿋꿋하게 산다지만, 여전히 3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무너진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경대가 시위를 하다 다쳐서 영안실에 있다고. 다쳤는데 왜 영안실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