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눈으로 발로…걸음마다 역사의 숨결 느끼세요

2007.02.06 10:28:00

재미있는 마라톤 코스 화성 여행

경기국제하프마라톤대회가 18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코스마다 숨겨져 있는 관광지들에 대한 참가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유는 세계문화유산  화성이 위치하고 있어 크거나 작은 문화유산들이 적지 않게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참가자들이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마라톤 참가는 물론 역사의 도시, 수원을 하루에 답사하기 위해서는 알찬 정보를 기반으로 다리 품을 팔아야 가능하다.마라톤대회 참가 만큼이나 참가자 모두에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원의 역사지를 소개한다. 마라톤 대회 참가 자들과 자녀들에게 역사 공부 기회를 제공할 역사가 서려 있는 곳들은 어디가 있는 지 한 번 순례해 보자.<편집자주>
▶술집으로 흥청거린 새 수막거리
새 수막거리는 장안문 밖 옛 국도를 따라 수성중학교 입구에 이르는 거리로 ‘새로 술집이 들어선 거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795년(정조 19년) 화성직로발참(華城直路撥站)으로 길의 혁명이 일어나 임금 행차길이 지지대 고개를 넘어 옛 1번국도를 따라 장안문까지 이어지고 장안문 밖에 영화역과 장용외영의 훈련장이 들어서자 이곳에 새로 술집이 들어서며 흥청거리게 됐다.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장안문
이 문은 화성 4대문의 북쪽 문으로 정조 18년(1794년) 건축됐다.
중국 역사에서 ‘장안’은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문자로 정조가 태평성대를 이뤘던 중국 한·당의 서울, 장안의 영화를 화성에서 재현하기 위해 북문의 이름을 장안문이라 하였다고 한다.
팔달문과 함께 화성의 가장 대표적인 건조물로서 서울에서 내려오는 수원의 관문이며 그 웅장하고 의장적인 모습은 오늘날 수원의 상징이라 할 만하다. 그 규모와 구조는 팔달문과 거의 같으며 서울의 숭례문(남대문)보다 더 크게 쌓은 것이 특징이다.
장안문의 외성으로 북옹성이 있는데 이것은 옹기를 반으로 쪼갠 폭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수동 옛 길 관거리
북수동의 옛 길로써 장안동 네거리에서 한 구간 더 내려온 네거리 북수동 209번지 왼쪽 사잇길로해서 북수동성당과 소화초등학교 옆까지 난 사잇길을 거쳐 종로 사거리까지 이어진 길이다.
지금은 골목길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정조 대왕의 능행차 길로서 현재 장안문과 팔달문 사이의 국도가 확장되기 전까지 주도로였다.이곳이 관거리라고 불리게 된 것은 조선시대 이후 관청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연로한 주민들에 따르면 일제시대에는 이 곳에서 3·1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지금은 북소동 주택가와 큰 길로 변했다.
▶구한말 군부대 주둔지 병정촌
병정촌은 북수동 311번지에서 323번지 일대에 있다. 이곳은 현재 북수동 천주교 성당 밑(남쪽)과 후생병원, 종로교회 자리로서 구한말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해서 병정촌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 후 수원군청이 있었는데 수원군 시대를 마감하고 수원이 시로 승격되어 화성군이 행정구역상 떨어져 나감에 따라 수원군청은 화성군청으로 바뀌었다. 그후 화성군청이 오산으로 이전하고 나서 지금은 시장, 종로교회, 후생병원 등이 들어서 있다.
▶수원군청 자리. 화성군청 자리
현재 종로교회 옆 후생병원이 있는 곳이다. 본래 수원군청은 화성행궁 내에 있었다가 이 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1932년 강본효취가 쓴 ‘경성과금강산’을 보면 화성행궁 낙남헌 자리가 수원군청 서무계로 사용되고 있다고 나와 있다. 해방이후 1949년 8월15일 수원읍 지역이 시로 승격이 되면서 이곳에는 화성군청이 들어서게 됐다. 한국전쟁 중에는 서울에 있었던 경기도청이 임시로 옮겨오기도 했다.
▶수원 대표장터 영동시장
팔달로3가 영동 9번지 일대에 있는 시장이다. 팔달문 동쪽 남문로 남쪽변에 있다. 옛날부터 문밖 시장, 성외 시장 등으로 불리며 4월9일에 장이 섰던 수원의 장터였으며, 곡식시장(싸전)이 활발하였다. 수원의 대표적인 장터로 20~30리 밖에서도 이 장터를 이용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다.
이 시장을 중심으로 고을이 커지자 상업이 번영하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에 ‘영정시장’이라 하였다가 1949년 수원시로 승격이 되면서 ‘영동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영동시장에는 200년 전부터 상인들의 번영을 위해서 지내오는 ‘영동 거북산당 도당굿’이 전해오고 있다.
▶팽나무와 정자가 있는 팽나무고개 삼거리
매교다리를 건너 왼쪽 고개길을 팽나무고개라고 하였다. 그곳에 보기좋은 팽나무와 정자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었다. 인계동과 경계지역인 매교동 13통 일대를 말한다. 지금은 원래의 팽나무 대신 작은 나무가 서있고 그 앞에 팽나무 고개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장화 없인 갈 수 없는 붉은 고개
세류1동사무소 앞의 큰 길을 붉은 고개라고 한다. 예전에 이 고개는 땅이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붉은 고개라고 불렀다. 땅이 너무 질어서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탑의 좌대가 남아있는 탑동
현재의 탑동은 옛부터 탑골이라고 불려왔다. 탑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탑동 485번지에 탑의 좌대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탑이 건립된 것은 확실하다. 탑을 세우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심은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보아 수구를 막는다는 뜻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수구를 막기 위해 탑의 좌대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4m와 남쪽으로 70m 양면에 우리나라 토종 홍송 수십그루를 심어서 방패로 삼았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북쪽과 남쪽에 14그루가 서 있었다.
이처럼 탑이 있다고해서 탑골이라고 불렸으나 정확한 탑의 건립 연유와 연도는 찾을 수 없다. 수령 700년 된 향나무 한 그루만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됐다.
▶골말과 성황제
탑동에 있는 골말은 본래 형석면 곡촌이었다. 공석(구운동)아래에 있다고 하공석이라고 한다. 탑골의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깊은 골짜기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원지역에서 현재까지 마을 제사를 지내고 있는 흔치 않은 곳이다. 우봉 이씨와 전주 이씨들이 가장 오래된 거주민들이며 그 외 손씨, 홍씨, 정씨 등이 살고 있다. 이 곳은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능행차 때 다니던 옛날 소리길로 ‘왕대미’라는 지명이 전한다.
골말 서낭당(성황당)은 당집의 형태가 아니라 600년 이상된 행나무를 신목으로 삼고 그 주위로 크고 작은 나무가 둘러서 있는 제사터로 마련되어 있다. 1982년 어느날 밤에 이 신목을 도벌당하고, 1993년 7월1일(음력) 그 자리에 어린 향나무를 심고 비석을 세워 성황당과 성황제에 관한 기록을 새겼다.
성황당에는 옛날 정조가 능행길에 이 곳을 지나다 성황당 앞에 당도하자 갑자기 말이 멈춰 선 뒤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는데 정조가 말에서 내려 성황당에 제사를 지내자 말발굽이 떨어졌다. 이 후 임금님도 이 곳만큼은 말에서 내려 걸어다녔다는 영험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넓은 들판 푸른지대
탑동 505번지 일대 서울 농생대 뒤로 넓은 들판이 있었다. 60년대 초 개성사람인 박준철이란 사람이 묘목, 딸기, 포도 등 과수원을 경영하다 이 과수원이 널리 알려져 서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곳은 지금까지도 푸른지대라고 불러오고 있다.
▶밤밭 율전동
밤밭은 율전동의 한글이름이며 윗밤밭과 아랫밤밭으로 나뉘어져 있다. 밤밭은 말 그대로 밤나무가 많아 지어진 지명이다.
밤밭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약 300여 년 전에 파주 염씨, 강릉 유씨, 인동 장씨 등 3성이 자리잡은 뒤부터 마을에 밤나무가 많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 3성은 이 곳에 자리잡은 뒤 자손이 번성해 지금까지도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남자들 울린 기생 홀란이 묘
홀란이 묘는 현 영생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묘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옛날에 기생이 있었는데 남자들이 자주 귀찮게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해 죽게 되었고 그 뒤부터 기생이 묻힌 묘를 홀란이 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이야기는 홀란이는 바로 기생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남자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고 정신을 혼란스럽게 할 정도로 미인이어서 ‘혼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혼란이’를 발음대로 하다보니 ‘홀란이’가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홀란이 묘는 얼마전 영생고등학교가 개교되면서 학교부지에 흡수되어 지금은 자취도 찾아볼 길이 없다.
▶정자가 있던 정자동
교구정, 영화정 등 정자가 있어 정자말, 정자리라 불린데서 동 이름이 유래됐다. 1914년까지 수원군 일용면 정자리, 진목동, 화산동 지역이었다.
1963년 수원시에 편입됐으며 1972년 파장동, 이목동, 율전동, 천천동과 합쳐 파정동으로 되었다가 1990년 파정동에서 갈라져 나와 정자1.2동으로 분동됐다./정민수기자 jms@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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