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그분들의 정신을 본받아 애국심을 함양하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호국’이란 나라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뜻이고, ‘보훈’이란 국가를 위해 공헌한 분들의 업적을 기리고 보답한다는 의미다.
광복 후의 혼란과 6·25전쟁으로 전 국토가 폐허로 변한 속에서도 짧은 기간에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함께 이뤄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된 것은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신명을 바쳐 싸우신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힘쓴 경북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 유필영 선생과 유인식 선생, 유면희 선생에 대해 살펴봤다.
3·1운동을 전개한 유필영(柳必永 1841.3.9~1924.11.28) 선생은 경북 안동(安東) 출신으로,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儒林)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됐다.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해 1919년 4월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던 송회근(宋晦根)이 피체되면서 발각됐고, 이로써 유필영도 일경에 피체돼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경북 안동 출신인 유인식(柳寅植 1865.5.3∼1928.4.29) 선생은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 대한협회(大韓協會)를 발기하고 안동에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해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했다.
안동 지방의 보수유림파로부터 반대에 봉착했으나 굴하지 않고 개화교육에 의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학교 교재로 우리나라의 주체적 민족사 책인 ‘대동사(大東史)’를 저술해 후세의 국사편찬에 크게 기여했다.
1907년 4월 양기탁·안창호·이동녕·전덕기·이회영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경상북도 지회에서 활동했다.
1920년 이상재·유진태 등과 전국 통일교육기관인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같은 해에 박중화 등과 전국 통일교육관인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설립에도 참가했다.
1922년 11월 이상재를 대표로 해서 47명의 지도급 인사들이 조선민립대학 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할 때 주동적으로 발기인이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23년 3월29일 각계 대표 400명이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전국적으로 1천만원의 기금을 모아 재단을 모집·구성해 민립종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하는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또 1927년 2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 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적극 참가해 안동지회를 설립하고 그 지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1928년 4월28일 서거하니 이상재에 이어 사회장(社會葬)으로 거행됐다.
저서로서 ‘동산문고(東山文稿)’, ‘대동사(大東史)’, ‘대동시사(大東詩史)’ 등과 그밖에 다수의 논문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6·10만세운동을 펼쳤던 유면희(柳冕熙 1906~1944.1) 선생은 중앙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인 1926년 6월에 이선호(李先鎬)로부터 융희황제의 인산일인 6월10일에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이에 가담했다.
당시 유 선생은 동교생 임종업(林鍾業)·이현상(李鉉相) 등을 동지로 포섭하고, 이들에게 국장 당일 살포할 격문 및 태극기 등을 나눠줬다.
거사일인 6월10일에 그는 이선호·임종업·이현상 등과 함께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국장행령을 봉송하고 난 뒤 학생들의 행렬 앞으로 나아가 각기 휴대하고 있던 격문을 살포하는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때 그는 현장에서 일경에 피체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는 6월20일 6·10만세운동 학생주동자 11명과 함께 기소되어 1927년 4월1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자료제공│국가보훈처 수원보훈지청
정리│이상훈 기자 lsh@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