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조선의 대륙사(大陸史) 여정을 위해”

2021.09.13 06:00:00 16면

 

- <독사신론>의 일깨움

“도깨비도 뜨지 못한다는 <땅뜨는 재주>를 부리어 졸본(卒本)을 떠다가 성천(成川) 혹은 영변(寧邊)에 갖다 놓고 안시성(安市城)을 떠다가 용강(龍岡) 혹은 안주(安州)에 갖다 놓으며, 아사산(阿斯山)을 떠다가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을 만들고 가슬라(迦瑟羅)를 떠다가 강원도 강릉군(江陵郡)을 만들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1장에 수로된 <독사신론(讀史新論/1908년)>의 한 대목이다. 애초 우리의 역사적 원점은 만주대륙인데 이 지명의 위치를 죄다 반도 내부에 옮겨버린 사대주의적 조선 사가(史家)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활동 무대를 좁혀놓으니 생각의 영토도 좁아져버린 현실을 개탄했던 것이다.

 

그가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맹렬히 비판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부여를 빼버려 조선문화의 근원을 진흙 속에 묻어버리고, 발해(渤海)를 버려서 삼국 이래 결정(結晶)된 문명을 짚더미에 내던져 버리고, 이두문과 한역(漢譯)을 구별할 줄 몰라서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이 되고 한곳의 지명이 여러 곳으로 된 것이 많으며...”

 

그래서 결국 자신과 자신의 역사에 대한 진상을 알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며 단재 사관(史觀)의 핵심을 그 유명한 “아(我/나)와 비아(非我/나 아님)의 투쟁”으로 요약한다.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의 상태에 대한 기록이다. 세계사란 세계의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朝鮮史)란 조선민족이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이렇게 보자면 E. H. 카가 던진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대답인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정의는 꽤나 한가롭다고 여겨질 판이다. 물론 그는 <러시아 혁명사>를 썼고 제2차 대전의 현실을 해석해낸 뛰어난 세계적 역사학자이다.

 

- <대동고대사관>에서 리지린으로

그러나 신채호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비아(非我)에 둘러싸여 억압받는 자신의 정체성(我)을 찾아가는 고된 역사의 행로를 모색한 것은 E H. 카 이상의 주목과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전후(戰後) 제3세계권에서 등장한 “탈식민주의 역사(Post-colonial history)”의 원조가 우리에게 이미 선구적으로 있었다는 사실에 눈떠야 하지 않을까? 이는 제국주의와의 투쟁에 따른 당연한 결과다.

 

 

단재 신채호가 만주를 조선 상고사의 역사무대로 주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박은식 역시도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1911년)>에서 만주를 중심으로 하는 대륙사관(大陸史觀)을 펼친다.

 

“하늘이 동양을 열어 대륙이 아득히 넓었으니 단군은 태백산(백두산)에 내려와 동방민족의 시조가 되었고”

 

여기서 단군의 고조선을 구성하는 동방 민족이라함은 부여(扶餘), 예(濊), 맥(貊), 비류(沸流), 숙신(肅愼), 옥저(沃沮) 등을 모두 포함하며 이는 조선후기 양명학자인 이종휘의 <동사(東史)>를 분석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덧붙이자면 그가 말한 동방민족은 중국 고대역사가 동이(東夷)라고 기록한 것과 같다.

 

 

이 동방민족 또는 동이 내지는 고조선족(古朝鮮族)의 활동 무대로 보자면 지금 중국에서 동북(東北)이라고 부르는 만주 전체와 한반도를 포함, 북경으로 가는 길목인 산해관(山海關) 동편 난하(灤河)가 흐르는 오른 편까지였으니 대륙사 자체라고 할 만하다. 더군다나 산해관 동편은 이들 동방민족 문명의 거점이자 고조선의 모태로 알려진 곳으로 “홍산문화(紅山文化)”의 발원지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바로 여기서 멈춘 까닭도 중국 한족(漢族)의 활동무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홍산문화는 기원전 4천 7백년경에서 2천년 중반에 이르기까지 유지된 고차원의 신석기 문명의 거점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 방면으로 일찍 눈을 뜬 우실하 교수를 비롯한 학자들이 홍산문화와 고조선의 역사를 묶어 깊이 파고 들고 있다.

 

중국은 중국의 기원문명이라고 여겨져온 황하문명보다 더 일찍 형성된 홍산문명의 발굴에 처음에는 당혹했으나 이제는 동북공정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도 자신의 문명권으로 내세우고 있다. 고대사로 보자면 산해관 동편, 동이(東夷) 문명권인데도 말이다.

 

 

북한의 리지린이 쓴 1961년 학위 논문인 <고조선 연구>는 그 자체로도 역작인 동시에 고조선의 강역(疆域)이 대륙임을 밝히고 이로써 반도사(半島史)로 제한당해왔던 우리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확정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일제 식민지사관의 근본적인 극복이자 우리의 문명사 전체의 그림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셈이다.

 

러시아 학자 U. M. 부틴이 이에 자극받아 고고학적 발견을 보완하여 1982년 <고조선 연구>를 내놓았고 윤내현 교수는 꾸준히 “대륙 고조선”의 관점을 설파해왔다. 그런데 이런 대륙사론은 기존 학계에서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다. 고조선의 도읍이 지금의 대동강 유역 평양으로 설정된 역사에 익숙했던지라 이런 주장은 과도한 민족사관이자 황당한 영토확장 논리로 여겨진 것이다.

 

 

 

- 만주와 유라시아 문명권

그러나 이제 “대륙사 고조선”은 낯설지 않게 되었으며 적지않은 학문적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사회의 뇌리에는 부여, 발해의 역사는 삭제되어 있으며 우리 상고사의 영역까지 담은 지도가 상식처럼 박혀 있지 못하다. 만일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한반도와 동북 3성까지 포함된 영토로 사고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이걸 바탕으로 고토(故土)회복을 주장하려거나 신(新) 북벌론(北伐論)을 펴자는 것은 아니다.

 

 

대륙에서 발원(發源)하여 거쳐온 역사가 우리 안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대단히 다르다. 세계적인 문명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이 쓴 <The Mediterranean (지중해 문명>이나 <Memory and the Mediterranean (지중해의 기억)>은 유럽 근대문명의 뿌리와 지중해 교역사, 그리고 고대문명의 탄생과 지중해의 교류망을 살펴본 것들이다. 이로써 자신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뿌리에 대한 깊은 관찰과 그 유산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만주 대륙과 유라시아 전체의 흐름을 엮어 파악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지게 되며 그 다양한 문명의 요소들이 어떻게 우리 안에 흘러들어와 오늘날 우리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채호는 조선사를 연구하려면 조선의 고어만이 아니라 만주어, 몽고어 등의 말도 연구해야 한다고 한 것은 옳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 또는 광개토왕비에 적힌 대로라면 추모(鄒牟)의 만주어는 ‘주림물’로 활 잘 쏘는 이를 말하며 옥저(沃沮)의 만주어는 ‘와지’로 삼림(森林)을 뜻한다고 한다. 관직명인 각간(角干)이나 발한(發翰)은 모두 같은 말로 각이 뿌리라는 의미이고 이는 ‘불’의 발음을 옮긴 것이며 발한의 발도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말을 기초로 간과 한을 풀자면 이는 모두 칸의 발음을 적은 것이니 각간이나 발한은 우리 말 발음대로 우리 글로 적으면 “불칸”이 된다. 석기 시대 이래 철기에 이르기까지 불을 다루는 것은 대단한 문명의 최첨단이고 이를 장악하고 있는 대장은 신적 위치에 있게 된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불의 신이 ‘Vulcan(불칸)’인 것은 유라시아 문명권 전체의 틀로 새겨보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좀 더 들여다 볼만도 하다.

 

- 식민지사관의 실증주의

이런 탐구가 꽉 막혀버린 것은 다름 아닌 일제 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의 역사 조작과 왜곡이 그 출발점이다. 조선 유가(儒家)의 사대주의적 역사관도 문제였으나 일본 제국주의는 아예 있던 자료들도 불태우고 남은 것들에 대해서는 왜곡과 조작을 서슴치 않았기 때문이다.

 

1915년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넣더니, 1922년 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꾸고 1925년에는 이를 천황칙령으로 “조선사편수회”라는 독립된 관청기관으로 변모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편수회”의 애초 그 출발이 “조선 반도사”로 되어 있는 것에 유의해봐야 한다.

 

이렇게 되기 전에 일제는 1910년 강제합병이 이루어진 직후 총독부 취조국을 중심으로 주요 역사서를 강제로 압수, 단군 관계 고조선사, 조선지리, 을지문덕 등 용장들의 이야기를 포함 민족사의 정신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책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그러나 사람들이 책을 숨길 뿐만 아니라 생각 이상으로 책들이 많아 이를 전부 그리할 수 없게 되자 방침을 바꾼다.

 

총독부가 지휘한 <조선반도사 편찬요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인들은 독서와 작문에 있어서 문명인에 뒤떨어지지 않아 그들을 무지몽매하게 억압하기는 오늘날 시세에서는 불가능하다. 조선에는 예부터 사서(史書)가 많으며 또한 새로이 저작된 것도 적지 않다. 그러니 이러한 사서들의 멸절을 기함은 오히려 그것의 전파를 조장하는 결과를 조장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공명, 적확한 새로운 사서를 읽히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同化)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며 그 효과 또한 현저할 것이다. 이것이 조선 반도사 편찬이 필요한 이유요, 편찬사업의 근본정신이다.”

 

이완용을 고문으로 앉혔으니 그 방향은 뻔했고 단군조선의 상고사는 원시시대로 만들었으며 그 이후는 한(漢)의 영토 시대(한사군/漢四郡)로 해서 중국의 지배를 역사시대의 출발로 삼았다. 그리고 삼한(三韓)부터 다루는 것을 서술의 순서로 잡았으니 그 속셈이 너무도 분명했다.

 

서술방식은 연대순으로 풀어가는 편년체(編年體)로 정해 그 당시의 기록된 자료가 없으면 배제했는데 이는 단군조선의 삭제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단군이 역사가 아니라 신화가 된 순간이었으며 최남선이 이를 문제로 삼자 돌아온 답은 “단군은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사상과 신앙의 차원에서 발전”했으니 그렇게 다루면 된다는 것이었다. 역사의 깊이와 넓이를 토막내버리는“식민지사관의 실증주의”는 이렇게 우리 역사를 본래의 형체를 알 수 없게 부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삼국유사> 조작이었는데 이를 최남선이 바로 잡는다. 문제가 된 문장은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국(國)자를 인(因)자로 고쳐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 가 ‘옛날에 환인이라는 존재가 있었으니’, 가 된다. 엄연한 고대국가가 원시시대 신화의 전승으로 만들어저버린 것이다.

 

- 또하나의 독립전쟁

일제 강점기 시기에 “조선사”를 읽고 쓰는 일은 우리들에게는 독립운동이었고 일제에게는 식민지 지배의 영구화 전략이었다. 신채호나 박은식 등에게는 그래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그 자체로 독립투쟁이었던 것은 당연했다.

 

뿐만 아니라 독립투사들이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의 거점을 만든 것도 이런 대륙사의 관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곳은 아무 연고도 없는 타향이 아니었고 치열한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는 역사가 오랜 세월동안 전개된 무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대륙사의 관점은 말할 것도 없고 반도사 자체도 아예 없다. 북의 현대사는 접근금지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소원은 이제 통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 노래는 지금 어디에서 불려지기는 할까. 토막이 나고 그 토막도 또 반토막이 난 채 역사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우리사회의 “사유의 무대”는 얼마나 좁아져버렸는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일제 강점기 때 혼신의 힘으로 전개되었던 만주의 독립전쟁 역사도 제대로 전승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유라시아 전체의 문명교류와 융합의 역사는 이런 기반에서는 발상 자체가 안 된다.

 

자기를 모르고 살아가는 존재, 자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역사도 모르고 살아가는 세대, 조선 또는 한국이라는 이 역사 공동체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할 이유가 없어진 사회는 누구의 손아귀에 잡혀 엄한 데로 끌려가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의식이 단명(短命)한 사회는 깊은 생각의 우물을 길어 올리지 못한다. 그 우물의 이름은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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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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