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혁명을 위한 ‘지뇌복(地雷復)의 괘’”

2021.11.15 06:00:00 16면

 

-<펜타곤 페이퍼>, 그 기만과 공화국의 위기

 

“거짓, 기만, 정보의 의도적 왜곡과 조작, 그리고 아예 대놓고 하는 거짓말이 정치적 목적을 이뤄내기 위한 합법적 수단이 되고 말았다. 이제 진실은 정치적 덕목이 더는 아니며,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당한 정치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쓴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의 한 대목이다. 이렇게 거짓말 정치가 팽배하는 것은 현실정치에서는 거짓이 더 강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짓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보다 더 설득력있게 들리고 이성에 대한 호소력이 강력하다. 거짓말을 하는 쪽은 그걸 듣고 있는 이들이 무엇을 듣기 원하는지를 이미 잘 알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을 듣는 쪽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말을 듣기 때문에 기획된 거짓을 신뢰할 만하다고 믿어버리고 만다.”

 

한나 아렌트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1971년 미국의 월남전 비밀공작을 밝힌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가 폭로되면서 미국 정치의 기만이 확실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펜타곤 페이퍼>는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가 주도해서 미국이 월남전에 어떻게 개입해 들어갔는지를 정리한 비밀보고서다.

 

 

이 문서에는 미국 정부가 미국 국민들 모르게 군사개입과 비밀공작정치를 어떻게 펼쳤는지, 월남정부의 정보기관과 군, 경찰에게 어떻게 고문기술을 포함한 폭력 시스템을 전수했는지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적어놓고 있다. 월남정세를 장악하려는 전략지침 분석용으로 작성되었다가 미국의 전쟁범죄 기록물이 되고 만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공화국의 위기>에서 국민을 속이는 거짓과 기만이 그 정치공학적 효용성에 빠져 결국에는 공화정을 파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최대의 피해자는 당연히 시민들이다. 이에 대처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기만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이른바 “탈진실(post-turth)의 시대”라는 말이 호들갑처럼 떠돌고 있지만 진실을 대체한 정치적 기만이 민주주의 사회를 교란시켜온 것은 사실 꽤나 오래된 일이다. 이런 거짓이 하나의 사회적 시스템으로 작동하게 되면 시민들은 진실을 가려낼 능력을 잃고 자기분열적 인식의 포로가 되고 만다. 자신을 착취하는 세력에게 지지를 보낸다거나 자신에게 궁핍을 가져오는 자들을 은인으로 알고 떠받드는 모순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다.

 

-인식의 이중성과 자기배반의 모순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가령 촛불혁명 당시의 매우 중요한 요구였던 “재벌개혁”이라는 말은 한국사회와 정치에서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부패한 특권카르텔의 핵심축이 시야에서 증발해버렸고 불평등의 교정은 대자본의 독점 구조를 먼저 혁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기본조건으로 해서 만들어진 우리 안에서의 공정”이라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왜곡되고 있다. 대자본은 다시 성역(聖域)이 되었다.

 

1950년대 미국 남부 앨라바마주의 야만적인 인종차별을 고발한 하퍼 리(Haper Lee)의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히틀러를 그토록 끔찍하게 미워하면서도 돌아서서는 어떻게 바로 자기 나라 사람에게 비열하게 대할 수 있단 말이야?”

 

나치스의 인종학살을 증오하면서 자기 나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과 학대에는 도리어 스스로 가담하고 있는 모순을 짚는다. 이 작품은 억울한 범죄혐의를 받은 한 흑인 청년을 변호하는 내용인데 흑인들에 대한 무차별적 가해행위는 아무런 해악을 입히지도 않은 앵무새를 죽이는 짓과 다를 바 없다는 은유가 담긴 제목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종차별은 인종의 차이를 넘는 가난한 이들의 연대를 막아버린다. 지배계급의 분열전술이다. 이와 다를 바 없이, 대자본이 그 기본틀을 만들어 내고 있는 불평등의 현실을 이 나라 국민들 대다수가 처참하도록 겪고들 있으나 화살은 다른 곳을 향해 쏘아지고 있다.

 

마르크스의 프랑스혁명 이후 현실에 대한 정치학적 분석서인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The Eighteenth Brumaire of Louis Napoleon)>은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가 그 역사성 강렬한 ‘나폴레옹’이라는 가문(家門)의 이름만 빼고는 허접한 존재일 뿐인데 어떻게 1851년의 쿠데타로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를 밝힌다.

 

-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과 <독일 이데올로기>

 

 

여기서 ‘브뤼메르’는 프랑스혁명력에 따른 10월 말에서 11월 말에 걸친 시기를 이르는 한편, 바로 같은 시기인 1799년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비교하는 의도가 담긴 제목이다. 보나파르트는 대중을 기만하는 방식으로 권좌를 잡는다. 이후 파시즘의 전술을 보여주는 기원적 사건이었다.

 

게오르그 루카치가 그의 <역사소설 (The Historical Novel)>에서 밝힌 바대로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이끌었던 유럽 전체에 걸친 혁명전쟁, 그리고 나폴레옹의 몰락이야말로 처음으로 ‘역사’라는 것이 대중들의 경험세계가 되도록 만든 사건들이었다.” 그 이전에는 왕조의 정치세계로 국한되었던 것이 대중의 정치적 체험의 차원으로 확장된 결과다.

 

따라서 중세 봉건사회에서처럼 혈통이나 종교가 아니라 대중을 움직이는 자가 권력자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 과정에서 각성되지 못한 대중에 대한 기만은 기본전략이 되고 만다.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는 ‘청년 헤겔파’의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적 공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목적은 지배계급의 사상과 철학을 대중들이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고리를 단절시키기 위함이었다. 지배사상과 철학이 은폐하고 있는 진정한 실체, 그 물적 토대의 이해관계를 폭로하는 것으로 진실이 드러난다는 논리다.

 

대중의 비판적 의식을 위한 논고(論考)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 물적 토대와 직접 맞부딪히면서 투쟁하는 과정이 없으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이 금기로 울타리를 쳐놓은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그걸 보호하는 국가기관의 장치를 파괴하는 실천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혁명의 실천과정이 인식의 혁명도 아울러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실천인 혁명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광범위한 인간변혁이 필요하다. 혁명이 필요한 까닭은 구체제를 뒤엎어 전복(顚覆)시킬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복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 속에서만 스스로 모든 낡은 찌꺼기를 목구멍에서부터 싹 씻어내고 새로운 사회를 이뤄낼 역량을 갖출 수 있는 지점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식의 유보론은 어떤 결정적 국면을 말하는 것이지 혁명이라는 건 과정 전체의 단계 단계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될 때 과정상의 고난과 실패는 혁명을 향한 도전의 과정이자 인식의 세계를 진화시켜나가는 근거지가 될 수 있다.

 

-율곡의 <동호문답>과 <만언봉사>의 채찍

 

 

이런 시기에는 그래서 반드시 “정치의 책무”를 일깨우는 언어가 대중의 사유 속에 활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는 또한 지도자, 권력자 역시도 함께 새겨가야 하는 바다.

 

왕조체제에서 왕권에 대한 정치교육을 의도로 쓰여져 경연(經筵) 교과서가 된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는 물론이요, 그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나 <만언봉사(萬言封事)>는 여전히 중요한 일깨움을 담고 있다.

 

<동호문답>은 율곡이 요새로 치면 연구휴가와 같이 선조가 내린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간중에 지금의 서울 옥수동에 있었다고 하는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는 곳에서 작성한 것이고 <만언봉사>는 선조가 시정개혁을 위한 지침으로 올리라고 요구한 바에 대한 답으로 만자(萬字)의 글로 쓰여져 왕만 보도록 봉(封)해져 올린 문서라는 뜻이다. <성학집요>는 이 모든 것을 집대성한 저작으로 영조와 정조가 즐겨 읽은 율곡 최고의 정치학 유산이다.

 

율곡의 시대는 연산군으로부터 중종과 명종 대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무오, 갑자, 기묘, 을사 4대 사화(士禍)로 말미암아 사림(士林)들의 기운이 꺾였고 정치혁파의 기세가 좀체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그야말로 “토붕와해(土崩瓦解)”라고 흙이 무너지고 기와들이 모두 깨져나가 도무지 수습할 길이 없어지는 상태가 되고 말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온 힘을 다해 개혁이라고 할 수 있는 “계지술사(繼志述事)”의 원칙을 직간(直諫)했으나 소용이 없게 되자 쓸쓸하게 향토로 돌아간 율곡이 세상을 뜬 지 8년 뒤인 1592년 동아시아 대(大)국제전란인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다. 조선은 삼천리 강토에서 폭포처럼 피를 쏟았다.

 

선조에 대한 율곡의 질책은 매섭다.

 

“전하께서 세상의 일을 유념하고 계시며, 백성들의 삶을 염려하고 계시지만 지금까지 정사(政事)의 폐단을 한 가지도 고치지 못하였고, 백성이 받고있는 고통을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신(臣)이 번번이 경장(更張)의 말을 올리기 때문에 전하께서 매우 듣기 싫어하고 계십니다. 신(臣)의 마음은 참으로 슬프다 하겠습니다.”

 

율곡이 본 당대의 현실은 어땠는가?

 

“지금 나라의 형세는 기절한 사람이 겨우 소생한 정도이고 맥이 안정되지 않았고 원기도 회복되지 않아 서둘러 약을 투여해야 그나마 살아날 듯합니다.”

 

기절해서 쓰러진 상태를 어떻게든 일으켜 살아나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그는 폭군(暴君), 그리고 용렬하고 어리석은 군주인 용군(庸君)과 함께 “혼군(昏君)”을 경계하는 말을 남긴다.

 

“치세를 추구하는 의지는 있으나 간사한 자를 변별해내는 명철함이 없고 믿는 자들이 현자가 아니며 등용한 자들이 재능있는 자들이 아니어서 나라를 점차 위태롭게 하는 것이 혼군(昏君)입니다.”

 

-"산지박”과 “지뇌복”

개혁정치의 길은 왕조 시대의 요구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별의 능력과 ‘폐정혁파(弊政革罷)의 의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역사를 올바르게 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바로 여기에서 때를 알아보고 기세를 살펴 “시(時)와 세(勢)”를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지금은 어떤 때인가, 무엇을 하는 시기인가, 무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각성이다. 이걸 근대적 용어로 “역사의식”이라고 말한다면 <주역(周易)>식으로 풀면 때의 변화의 흐름과 적기(適期)를 알아보는 “시중(時中)”에 대한 각성이다. 달리 말하면 시간이 순차적으로 가는 ‘크로노스(Chronos)’가 아니라 역사의 기습적인 격동이 몰아치는 “카이로스(Kairos)의 때”를 포착하는 능력이자 “혁명의 시간에 돌입하는 운동”이다.

 

 

<주역>에서 “산지박(山地剝)”이라는 괘는 양(陽)의 기운이 겨우 살아남아 있고 음(陰)이 강세를 이뤄 소인이 득세하고 군자가 핍박을 받는 형국이라고 한다면 그다음에 이어지는 “지뇌복(地雷復)”은 그걸 역전 또는 전복시키는 괘이다. 시와 세가 뒤집히는 거다. 이 과정에 자신을 참여시키는 존재가 바로 한나 아렌트의 “저항적 존재”이자 마르크스가 말했던 “혁명운동의 실천 속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인간”이다.

 

소인배들의 기만과 거짓이 판을 치고 촛불혁명의 추억은 아련해지고 있으며 혼군을 닮은 정치가 비틀거리고 있는 때이다. 난폭하고 무지하며 오만불손한 무뢰한(無賴漢)들이 패거리를 지어 권력을 찬탈하려는 위태로운 때이다. 이런 시기에 “시중(時中)의 지혜”를 몸에 새겨 우리의 껍데기를 벗기고 상처를 주는 “박(剝)”의 운(運)에서 세찬 기세로 원기를 솟게 할 “복(復)”의 운을 만들어야 할 카이로스의 순간이 오고 있다.

 

강물에 들어가야 강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고 어찌해야 물길을 돌릴 수 있는지 비로소 명확히 알 수 있는 법이다. 혼자 힘으로 안 되면 함께 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 시대의 <만언봉사>는 우리를 직간(直諫)의 힘으로 마주하고 있다.

 

 

 

 

 

 

 

 

 

 

 

 

 

 

 

 

 

 

 

 

 

 

 

김민웅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15번길 3-11 (영덕동 1111-2)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