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수의 월드뮤직 세계사] ‘노예를 살린 존 브라운의 죽음’

2022.12.12 06:00:00 13면

 

 

세계사의 3대 거짓말을 꼽으라면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빵 없으면 케이크 먹으면 되죠!’, ‘노예해방을 위해 시작한 미국 남북전쟁’이라는 말을 들고 싶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18세기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바레티의 창작물에 나온 부분이지 갈릴레이가 실제 한 말이 아니며, ‘빵 없으면 케이크를.....’도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에 나온 글로 앙트와네트의 무개념을 드러내기 위해 누군가 지어 퍼뜨린 말이다. 미 남북전쟁은 미 연방을 탈퇴한 남부에 대한 응징에서 시작된, ‘미연방수호’가 목적이었던 전쟁이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남부를 이기기 위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노예제도를 뒤흔들기 위한 것이었다. 링컨이 노예해방론자이긴 했지만 그것이 그의 전 생애의 주제는 아니었다. ‘노예 해방’을 위해 생을 던진 이는 따로 있다. 미 육군 대령이었던 존 브라운( John Brown 1800-1859)이 대표적이다.

 

1856년, 브라운은 캔자스 동부의 포타와타미에의 고립된 오두막에서 다섯 명의 노예제도 찬성론자를 살해해 지명수배자가 된다. 불가피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브라운은 공공연히 ‘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남부인들과의 평화적 협상은 불가능하다. 노예제도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폭력혁명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노예해방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투신하게 된 브라운은 자식들도 투사로 만들었다. 두 번 결혼해 스무 명의 자식들을 두었는데(첫 번째 부인으로부터 7명, 둘째 부인으로부터 13명) 아들들 대부분이 아버지를 따랐다.

 

포타와타미에 오두막 살인사건으로 지명 수배를 받던 브라운은 본격적인 노예해방 운동을 결심한다. 노예 등 지지자, 약 5000명을 무장투쟁전사로 만들기로 결심, 이에 필요한 무기를 연방정부의 하퍼스 페이 무기고에서 탈취하려한다. 그러나 1859년 10월 결행된 그의 거사는 곧바로 달려온 지역 농장주들과 민병대, 연방군에 의해 좌초된다. 그 자리에서 생포된 브라운은 버지니아 주정부에서 반역죄, 포타와타미 오두막에서의 살인죄, 노예반란 선동죄 등으로 재판받은 끝에 교수형으로 처형된다.

 

미국인들은 존 브라운의 노예해방운동과 처형이, 1861년에 일어나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 남북전쟁의 단초였다고 생각한다.

 

남북 전쟁 중 북군의 진군가로 불리웠던 노래가 있다. 제목하여 ‘ 존 브라운의 시체(John Brown’s body)’

 

존 브라운의 몸은 무덤에 누워 썩어가지만/ 그의 영은 진군하고 있다네/ 하늘의 별들은 따뜻하게 죽어간 존 브라운의 무덤을 비추고 있네/ 영광 영광 헬레루야.....후략......

 

들어보면, 아, 이 노래! 하며 단박에 알 것이다. 학교 교가로, 찬송가로 익히 귀에 익은 리듬이다. 이 진군가는 전쟁 후, 가사가 바뀌어 미국 개신교의 찬성가로 불렸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이 그들이 세운 학교의 교가로 쓰면서 퍼져나갔다. 대의와 타인의 존엄을 위해 생을 바친 존 브라운의 삶을 떠올리면서, 존 바에즈와 휘트니 휴스턴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들어보시길.

김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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