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서는 그간 연재해 왔던 살롱 시리즈를 마무리 짖고자 한다. 살롱은 17세기 시작돼 18세기 파리에서 크게 번성했으며, 대표적인 살로니에르(살롱 여주인)로는 마담 조프랭, 마담 뒤 데팡, 마담 레피나스, 마담 네케르 등 여러 명이 있었다. 이 살롱들은 지적 사교 활동의 중심지로 예술가, 학자, 작가들을 한데 모아 프랑스식 대화 기술을 발전시키고 계몽주의를 꽃피우게 했다.
살롱은 또한 교육받은 여성들에게 자신을 표현하고 남성들과 정치, 종교, 사회 문제에 대해 토론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따라서 철학자들은 여성의 종속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여성의 천부적 권리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혁명이 가까워질수록 살롱은 급진화 되어 갔다. 1784년부터 혁명 초기 세 차례의 입법 기간 동안, 살롱은 어떤 면에서는 클럽과 아카데미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즉, 다양한 프로젝트가 개발되는 정치적 장소이기도 했다. 귀족 살롱은 차츰 사라지고 클럽이 생겨났다. 남은 살롱들은 정치화되고 클럽이나 민중 단체와 함께 혁명 사상을 교환하는 장소가 되었다.
롤랑 부인(Madame Roland)의 살롱이 대표적이었다. 롤랑 부인은 1791년 2월 자신의 살롱을 파리 게네고(Guénégaud) 거리에 오픈하고 계몽주의 시대의 여성들처럼 운영했다. 단지 그녀의 살롱은 최초이자 유일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정치적 목적을 띄고 있었다.
롤랑 부인은 1754년 3월 17일 부유한 장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잔 마리 필리퐁. 그녀의 아버지 가티앵 필리퐁은 판화사로 일했고 어머니 마르게리트 비몽은 하녀의 딸이었다. 이들은 일곱 자녀를 두었으나 잔 마리를 제외하고 모두 유아 때 사망했다. 외동딸로 남은 그녀는 부모의 온갖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했다.
소녀는 조숙했고 배우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특히 꽃을 무척 사랑해 식물학에 관심이 많았다. 독서에 대한 열정 또한 타고나 일찍이 플루타르코스 같은 고대 작가부터 계몽주의 철학자들, 특히 몽테스키외, 볼테르, 그리고 그녀의 멘토가 된 루소의 작품들을 탐독했다. 그리고 곧 공화주의 이념을 받아들였다.
지적 탐구를 함께할 동등한 상대를 찾던 그녀는 스물여섯살 때 자신보다 스무살 연상인 제조업 감독관 장 마리 롤랑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남편은 인품이 좋을 뿐 아니라 부유하고 학식이 있었다. 그녀는 그를 다정하게 ‘존경스러운 노인’이라 불렀고,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며 진정한 지적 동반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억압에서 탈출하고자 이 결혼을 끝까지 관철시켰다.
그 후 9년간 아미앵과 리옹에 거주하며 남편의 조수 역할을 했다. 1789년 혁명의 이상에 깊이 공감한 그녀는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리옹에서 민중 단체 네트워크 구축과 각 지역별 클럽 연합체 창설을 장려했다.
1791년 2월 파리로 이사한 부부는 혁명에 참여했다. 이때 롤랑 부인은 게네고(Guénégaud)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 살롱을 열어 큰 인기를 누렸다. 이곳에는 페티옹(Pétion)과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같은 자코뱅 의원들이 모여 들었고, 점차 파우셰나 브리소(Brissot) 같은 언론인, 작가, 정치인들이 드나들며 지롱드파의 아지트로 변모했다.
특히 브리소 의원은 그의 오랜 지인이나, 공통된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공익에 대해 열정적인 의원들을 소개해 주었다. 롤랑 부인은 이들을 그녀의 살롱으로 일주일에 네 번 정도 초대해 모임을 가졌다.
그녀에게 살롱은 다음과 같은 존재였다. “제가 관심 있는 사안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정치적 논쟁을 따라가고 사람들을 연구하는 취미를 키울 수 있었다. 저는 여성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결코 그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회의는 제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지만, 저는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다. 저는 원 밖 테이블 근처에 앉아 그들이 토론하는 동안 손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편지를 썼다. 하지만 때때로 그랬듯이, 저는 그들이 하는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았고, 때로는 제 생각을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 그곳에서 그들은 현 상황, 의회의 현황,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제안할 수 있을지, 백성의 이익, 법원의 운영 방식, 그리고 개인들의 책략 등을 검토했다. 저는 이러한 회의에 큰 관심을 가졌고, 비록 제 성별에 걸맞은 역할을 결코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 회의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세련된 사교장이었던 그녀의 살롱은 지롱드당 정책 발전의 용광로 중 하나였다. 그녀의 남편은 살롱을 통한 인맥 덕분에 1792년 3월 23일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 롤랑 부인은 남편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인민사회 연방 프로젝트와 이후 부서별 정치 클럽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1792년 6월 10일 국왕에게 보낸 유명한 서한을 그녀는 남편의 이름으로 작성했다. 이 서한에서 롤랑은 국왕에게 거부권을 포기하고 법령을 승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녀의 남편은 3일 후 장관직을 박탈당했다. 2개월이 지난 8월 10일 왕정 몰락 이후, 남편은 다시 내각에 복귀했다. 하지만 그의 무대응을 비판하는 급진파의 거센 공격에 부딪쳐 결국 롤랑 부부는 1793년 초 온갖 모욕과 공격, 위협에 지쳐 정치 생활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녀의 살롱은 수많은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그곳은 지롱드파의 비밀 조직으로, 영향력 있는 여성이 지배하며 뒤에서 정치적 음모가 꾸며지는 장소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망상은 구제도의 살롱 여주인들의 영향력을 낙인찍고 사적인 살롱 공간을 공적인 의회 공간과 대립시키려는 공화주의 담론과 맞물려 널리 퍼져 나갔다.
남편이 퇴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롤랑부인은 지롱드당의 웅변가 중 한 명인 부조와 순수한 우정 관계를 맺으며 지롱드당에 계속해서 관여했다. 급진파와 코뮌의 비방을 받은 그녀는 1793년 6월 2일, 특히 지롱드파가 혁명 재판소 설립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우려한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의 이름으로 체포 명령을 내렸다.
남편은 피신에 성공했지만, 그녀는 체포에 순순히 응했다. 6월 24일 석방되었지만 같은 날 다시 투옥되었고,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감옥에서 회고록을 집필했다. 이 회고록은 지롱드당의 역사와 그녀의 개인적인 정치 참여에 대한 매우 귀중한 증언집이 되었다. 1793년 11월 8일 공화국에 대한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그녀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같은 날 저녁 처형되었다. 혁명 광장의 자유 여신상 앞에 절을 하고 단두대로 향하던 그녀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오, 자유여! 네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저질러지는가!”
서른아홉의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롤랑 부인은 살로니에르이자 프랑스 혁명의 주역이었다. 혁명 기간 동안 발전하는 민주주의 운동에 열광한 이 여성은 정치 무대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고, 지롱드파 정책 수립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적들에 의해 크게 과장되고 왜곡되었으며, 그로인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그녀는 회고록에서 남편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정당화하며, 정치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성별 규범을 넘어서려 했던 혁명 여성들이 겪었던 제약과 역설을 생생히 묘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