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을 수 있을 때까진 몇 번이고 와야지.”
지난 3일 열린 제주4·3 희생자 추념식 현장에는 70여 년 전의 아픔을 되새기는 추모 발걸음이 이어졌다. 섬을 떠난 유족은 물론 수도권 등 전국 각지에서도 같은 시간을 기억했다.
이날 오전 10시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8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는 생존 희생자와 유족, 정계 인사, 지자체장, 군·경 관계자 등 약 2만 명이 참석했다.
희생자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 앞에는 유족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80세가 넘은 할머니는 국화꽃 네 송이를 들고 불편한 다리를 이끌며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이 할머니는 “아버지와 큰아버지, 오빠와 사촌오빠가 모두 희생됐다”며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찾아와 억울하게 떠난 가족들을 위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당시 40세 나이로 가족들 앞에서 희생된 고(故) 김영수 할머니의 손자 양영민(66) 씨도 각명비를 찾아 여러 차례 절을 올린 뒤 이름을 어루만졌다.
양 씨는 “4·3은 당시 충돌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을 기억하는 일”이라며 “역사가 왜곡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추념식 전날 2일 제주서 처음 열린 ‘4·3 평화 대행진’에서 만난 유족 김춘보(79) 씨는 “어떤 경우에도 무력으로 평화를 만들 수는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추념의 메시지가 평화 대행진을 통해 전해지는 사이, 제주 일상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관광객이 오가는 서귀포시 표선면 일대는 평온했다. 상점과 숙박업소도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표선해수욕장 일대는 4·3 당시 집단 희생이 발생한 공간과 맞닿아 있다. 표선면 한모살(백사장)은 주민들이 집단으로 희생된 장소다. 인근 지역도 토벌 과정에서 피해가 많던 곳이다.
현재의 일상적 풍경과 과거의 집단 희생이 한 공간에 겹쳐져 있다는 점에서, 4·3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대표 관광지 제주민속촌 역시 4·3의 학살터였다는 점에서 표선 한모살과 맞물린다. 관광과 일상이 이어지는 장소와 과거의 비극이 물리적으로 겹쳐 존재한다.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와 제도적 정비를 거치며 현재 4·3은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 사건으로 규정됐고, 특별법 제정과 진상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사과와 보상 절차가 이어지고 있다.
4·3에 대한 기억은 제주를 넘어 전국으로 확산 중이다. 경기도청에도 4·3희생자를 기리는 추모 공간이 마련되는 등 타 지역에서도 사건의 의미를 공유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4·3을 둘러싼 논의는 현재진행형이다. 정치권에서는 추가 진상규명과 보상 확대, 역사 왜곡 방지 등을 담은 제주4·3특별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한 유족은 “지역을 넘어 기억하려는 움직임과 제도적 보완 논의가 함께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4·3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역사”라고 말했다.
잊혀져가고 있는 4·3은 해방 직후 좌·우 대립으로 혼란을 겪던 1947년부터 6·25가 끝난 뒤인 1954년까지 제주서 발생한 무장 봉기와 이에 대응한 미군정과 정부의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1947년 3·1절 기념식서 벌어진 우발적인 경찰 발포를 시작으로 본다. 이를 계기로 제주 총파업이 시작돼 육지에서 온 증원 경찰과 주민 간 갈등이 심화됐다. 1년 여 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위원회 '인민유격대'가 경찰지서와 우익인사 등을 공격하면서 본격적인 무력 충돌로 확산됐다.
미군정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하고 군·경을 투입해 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서 국군 제14연대 내 남로당 일파가 제주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여순반란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토벌 작전은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부에서도 계속됐다. 일반 주민까지 대거 희생되면서 마을 단위 초토화, 집단 희생 등이 발생했다. 김대중 정부시절 제정된 4·3특별법에 따른 공식 조사에 따르면 희생자 상당수는 남로당 무장대가 아닌 민간인이었다.
[ 경기신문 = 제주 / 김한별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