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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 보이는 드넓은 골프장서 맞이한 남반구 봄 눈 감는 순간 ‘평온의 세계’가 찾아왔다

이한숙 작가의 감성여행기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

 

 

레저스포츠의 천국 퀸즈타운에 도착
일행들 “골프치겠다”며 만장일치 선택
사람도 드물어 그야말로 ‘황제골프’

이곳 할머니들 골프치며 유쾌한 수다
사람들 기다리며 무료함까지 느끼기도
바쁜 일정에 나를 돌아볼 수 있어 흡족


그렇게 고대하며 액티비티의 천국 퀸즈타운에 왔으면서 모든 옵션을 뿌리치고 다섯 명은 모두 골프를 택했다.

그들에게 골프는 애초 메인 관심사가 아니었다.

자기 기호와 취향대로 다양하게 즐기고 그 경험을 나누며 함께 기뻐하는 것이 내 머릿 속의 그림이었다.

 

 

 

사람들은 분명 다른 것을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강한 주장이 서서히 중론이 되더니 모든 사람이 그 중론을 따라 골프장으로 오게 된 것이다.

“다른 것도 할 수 있어요. 각자 원하는 것을 하도록 도와드릴 수 있어요”라고 말했지만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괜찮아요”였다.

이럴 때 괜찮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한국 사람들은 괜찮다는 말을 너무 포괄적으로 쓴다. 속은 그렇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불편할 때, 튀지 않고 무난하게 받아들여지고 싶어서 괜찮지 않으면서 괜찮다는 말을 쓰는 것이다. 그 말을 얼마나 자주 쓰는지를 분석하면 진짜 문제가 드러날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야’하며 매사 쉽게 타협하다보면 솔직한 감정과 대면할 기회가 없다. 그 결과 정말 필요한 것을 개선하지 않고 대충 살게 된다. 우리는 모두 어디쯤에선가 그렇게 타협하고 사

 

 

는 비겁한 사람들인지 모른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러 거리낌 없이 선택하고 즐기러 나간 두 젊은이가 부럽다. 어쩌면 그점에서만은 그들이 우리 인생 선배인지 모른다.

주중이라 그런지 골프장은 한가했다. 사람이 없는 골프장을 다 차지하고 여유있게 골프를 칠 수 있다는 사실에 모두 기뻐했다. 그들이 9홀을 돌고 올 시간에 맞춰 식당에서 요깃거리를 주문했다. 주문하는 사람이 없으니 메뉴도 제한적이었다. 식사 메뉴는 아예 없었다. 파이와 샌드위치가 요기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침 나절의 쌀쌀한 기운이 완전히 물러나고 따사로운 햇빛이 공간을 가득 채운 테이블에서 사람들은 내가 시켜둔 간식을 맛있게 먹었다. 이곳 지역 맥주인 스파이츠(Speight Beer)를 한 잔 곁들이니 소찬이 성찬이 됐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날씨가 화창했다.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고 벚꽃이 피기 시작한 언덕에 봄이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날씨 참 좋네요”

“어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날씨예요”

“압박 없이 골프를 칠 수 있으니 최고예요”

“아, 이 시원한 맥주 한 잔, 최고예요”

“황제골프의 진수를 여기서 맛보네요”

원래 예약하려던 골프장에서 치지 못하는 아쉬움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듯 했다. 비교할 수 없으니 이곳이 그들에게는 최상이었다. 시설 보다는 자유로움, 그것이 그들에겐 더 소중했다. 그렇다고 이곳 환경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다. 비교적 잔디도 잘 관리해놓았고 멀리 설산이 골프장을 에워싸고 있어 경치도 좋았다.

요기를 한 그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자 다시 나만 남게 됐다. 한산한 골프장 만큼이나 라운지도 한산했다. 소파 테이블에 놓인 잡지를 펼쳐 들고 ‘최고의 풍경을 자랑하는 세계의 골프장 100선’을 읽었다. 소개된 골프장은 대부분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위치에 있었다. 설산 위에 있어서 헬리콥터를 타고 올라가 쳐야 하는 골프장도 있었다. 저마다 눈을 호사시키는 풍경이어서 흥미로웠다. 꼭 방문하고 싶은 몇몇 골프장은 사진으로 찍어뒀다.

 

 

 

바람을 막아주는 창문 덕에 봄 햇살이 따스했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무료했다. 아무 할 일 없이 주어진 한가한 시간이 낯설고 불편했다. 여행지에서마저도 부지런히 계획하고 하나라도 더 챙겨 경험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아직 여행의 고수는 못되는 것인가. 여행을 할 만큼 했고 앞으로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여행할까를 늘 고민하는 나인데. 이런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건 움직이고 경험하는 것을 더 즐기는 내 기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빈 시간을 무익하게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다.

눈을 감는다. 내 안에 들고 나는 생각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차차 내 안에 다른 눈이 열렸다. 몸을 감싼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감은 눈앞에서 펼져지는 빛의 향연을 즐겼다. 붉은색으로 시작해서 블루와 녹색, 보라색의 동심원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눈으로 보는 세계를 닫으니 주변의 소리가 살아났다. 좀 전에는 잘 듣지 못했던 소리들이 무척 생생해졌다. 그 모든 소리의 진원들이 다 나의 연장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는 이 기막힌 느낌, 진정한 평온이 이런 걸까. 근심도 조바심도 무료함도 다 내려놓고 현재에 머문다는 것이 이런 걸까. 내 속의 잡음을 꺼야 진짜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분명했다.

할머니들의 소란 때문에 눈을 떴다.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진 않은데 어떻게 그 시간이 지나갔는지는 모르겠다. 미동도 하지 않고 그렇게 앉아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세상과 함께 있었지만 오로지 나만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아니 세상이 있다는 것도 잊을 만큼 세상과 나 사이에 경계가 없었다는 느낌, 나아가 나의 존재도 지워져버린 느낌, 아주 다른 시간에 존재하다 돌아온 느낌이었다. 눈을 뜬 것이 아쉬웠다.

60대 후반이나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할머니들은 9 홀을 막 돌고 온 모양이었다. 수다는 만국 여자들의 공통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그들은 한 바탕 수다를 떨며 커피 브레이크를 즐겼다. 자주 오는지 서로 허물이 없어 보였다. 알고보니 골프는 사치가 아니라 할머니들의 소일거리였다. 커뮤니티가 골프장과 연계해 저렴하게 혹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길을 터놓았던 것이다.

할머니들 등 너머로 높은 산을 바라보았다. 애로타운이 얼마나 첩첩 산중에 있는 마을인지 실감이 났다. 365일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가지만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지형상 이들의 삶은 폐쇄적일 수 밖에 없다. 여행을 가는 것을 제외하면 삶의 반경이 무척 제한적이게 보인다.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한참을 날아온 우리가 마치 일상인 냥 그들 속에 섞여 골프를 치는 것이 묘한 생각에 젖게 만든다. 불과 수십년 전에는 우리가 그런 환경에 살았다. 6·25 전쟁에 지원군을 보내준 나라, 그들 눈에 우리는 도움을 받아야하는 외지의 아주 작고 폐쇄적인 나라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가 됐다. 그동안 한국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이곳은 개발을 제한에 묶여 달라진 게 별로 없으니. 무엇이 좋은 건지는 늘 가리기 어렵다.

18홀을 다 돌고 나니 3시 30분, 흡족한 그들은 더 이상의 일정이 없어도 하루를 제대로 보냈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더구나 몸이 피곤해 원래 계획한 애로우타운 호수 산책을 내키지 않아했다.

대신 돌아가는 길에 들를 수 있는 깁슨밸리 와이너리에 가서 와인 시음을 하고 곁들여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계획된 것을 못하는 것에 대한 내 안의 저항은 내 제안이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라기 보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한 저항임을 안다.

 

 

 

여행 동안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배울 수 있도록 이들에게 ‘사람책’을 제안했었다. 사람 만큼 풍부한 책은 없다는 것이 평소 내 생각이다. 앞에 놓고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것이 사람책을 읽는 방식인데, 생각보다 강력하다. 그들은 이것도 서로 너무 잘 안다는 이유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안다고 하는 사이가 가장 모르는 사이일 수 있다는 나의 주장은 먹히지 않았다. 내가 기획한 여행을 통해 사람들이 시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기를 바라는데 이 팀은 시작부터 어그러지는 기분이었다. 불편했다. 그것은 ‘내가 단순히 여행 안내만 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닌데’ 하는 저항이었다. 그것을 나는 빨리 해결해야 했다.

/정리=민경화기자 m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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