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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우산속의 득도

 

얼마 전 가을비 내리는 날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빗방울처럼 나뭇잎이 무리를 지어 떨어진다. 낙엽을 바라보며 빗길을 걷고 있었다. 마음이 아픈 사람과의 동행이라 나도 마음이 쓰였다.

감기라도 걸리면 혼자 고생할까봐 우산을 받쳐 주었다. 그런데 그 쪽에서는 비를 맞는 것보다 낙엽이 지는 모습이 마음이 쓰이는지 아직은 나무에 매달려 있어도 좋은데 하며 나무로 시선을 건넨다. 여기저기 바라보며 걷다보니 자꾸 우산 속에서 빠져나간다. 내가 걸음이 느려서 그런가 하고 열심히 따라가도 여전히 꽃으로 나무로 쫓아가고 우산 속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내가 혹시 불편하게 하고 있나 생각을 해도 그 때는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쳐 우산을 접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구름이 만드는 귀여운 토끼가 달아날까봐 없는 솜씨에 서둘러 사진을 찍는다. 나뭇가지를 흔들어 빗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미처 피하지 못해 얼굴이랑 옷이 젖기도 하고 마른 풀 틈에 핀 씀바귀 꽃을 보며 꽃보다 쓸쓸하게 웃는 그녀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모처럼 실컷 웃었다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답답하게 가슴을 짓누르던 게 뻥 뚫린 기분이라며 어린 아이처럼 좋아한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갈치조림을 해서 밥을 차렸는데 나는 밥 생각이 없어 밥을 눌려 누룽지탕을 해서 한 모금씩 넘긴다. 일부러 해 준 갈치조림을 밀쳐두고 갑자기 숭늉그릇을 끌어당겨 처음엔 수저로 몇 번 떠먹다 성에 안 차는지 얼른 일어나 국자를 들고 덤빈다. 누룽지에 숭늉까지 마시고 소화시키러 나가자고 일어선다.

어두운 거리는 빗물에 젖어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 팔을 끼었다. 갑자기 팔을 풀더니 우산을 빼앗아 든다. 눈앞이 휑해지며 그제야 아차 싶었다. 자꾸 우산 속에서 빠져가던 이유가 떠올랐다. 나보다 키 큰 사람에게 우산을 받쳐주니 말도 못하고 얼마나 불편했을지 눈치 없이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배려라고 해서 다 상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분별없는 배려가 오히려 상대를 곤란하게 할 수도 있고 어렵사리 혼자 꾸려가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언니, 남 클 때 뭐했어? 다음부터 우산 들 꿈도 꾸지마, 우산은 나처럼 키 크고 늘씬한 사람이 드는 거야.“

내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끌어당긴다. 우리는 그렇게 사귀는 사람들처럼 한참을 걸었다.

아버지의 알콜 중독이 점점 심해지면서 성장기는 늘 출렁거렸다. 집에 들어오면 어두컴컴한 방에 혼자 웅크리고 앉은 엄마를 보면서 같이 우는 게 지나온 시절의 가장 뚜렷한 그림이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의 도피행으로 시작한 결혼생활도 가족이 아닌 도박을 택한 남편으로부터 어린 딸을 데리고 나왔고 말랭이처럼 시든 엄마의 얼굴이 상처를 더 깊게 했다.

아버지는 알콜 요양원을 내 집처럼 들락거렸다. 처음엔 술을 멀리 하는 듯해도 사흘도 지나지 않아 난폭성은 도를 넘었다. 의사의 권고대로 독하게 마음먹고 일 년을 입원시키기로 했다. 밤이면 아버지가 욕지거리를 하면서 뛰어오는 소리와 엄마에게 욕을 퍼붓던 고모들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울먹이는 어깨는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오직 너하고 사랑하는 딸의 미래만 생각해.”

깨우침은 하루도 못가고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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