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30 (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옛오늘 제소리] 김면과 김성일

  • 김영호
  • 등록 2020.08.04 06:34:49
  • 인천 1면

 

“싸워도 죽고 싸우지 않아도 죽는다. 차라리 한번 싸워 사생을 결단해야 한다”는 서애 유성룡의 말처럼 지도층은 죽음 앞에서도 품격을 갖추어야 했다. 그러나 왜군의 선단이 나타나자 경상 좌수사 박홍, 우수사 원균은 화살 한 발 쏘지 않고 도망쳤다. 동래부사 송상현 같은 관리가 있어 그나마 적의 진격을 하루라도 늦출 수 있었다.

 

전국에서 처음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는 적과 싸우지 않고 도망친 경상감사 김수 처단을 자신의 첫째 임무로 삼았다. “네가 조금이라도 신하된 자로서 의리를 안다면 너의 군관으로 하여금 너의 머리를 베게 하여 천하 후세에 사죄해야 마땅하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장차 너의 머리를 베어 신인(神人)의 분노를 씻겠다.”

 

이 말을 들은 김수가 ‘역적 곽재우’라고 하면서 곽재우가 순수한 충정으로 의병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학봉(鶴峯) 김성일(1538~1593)은 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직접 만나본 조선 고위관료였다. 그는 정사 황윤길과 달리 일본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며 전쟁 준비에 반대했던 커다란 죄를 지었다.

 

김성일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송암(松庵) 김면(1541~1593)은 조정에서 두 차례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거절하고 학문에 몰두하던 재야 선비였다. 전쟁이 터지자 김면은 형제들과 의논해 재산을 모두 풀어 장정을 모으고 군량을 확보하여 창의의 깃발을 들었다. 김면은 남명 조식의 제자이고 김성일은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곽재우와 김수가 충돌했을 때 김면과 김성일 두 사람이 나서서 이들을 설득하고 화해시켰다. 경상도에서 관군과 의병이 연합하여 왜적과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노력 때문이다. 김면은 말을 달리면서 화살을 쏘아서 목표물을 맞출 정도의 무예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전술에도 밝아 강바닥에 말뚝을 박아 왜군의 선박이 걸리면 집중 공격하고, 고개에서는 지리에 밝은 산척(山尺)을 앞세워 기습전을 펼쳤다. 잇따라 승전보를 올리자 인근의 피란민들이 김면의 부대에 따라붙었다. 피란보다 김면의 군대를 따라가는 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김면은 금산과 개령 사이에 주둔한 적병 10만과 우지에서 대치하다가 공격해오는 적의 선봉을 진주목사 김시민과 함께 지례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 대첩으로 합천군수에 제수되었으며, 그 뒤 무계에서도 승전하여 의병도대장의 교서를 받았다. 그의 활약상을 보고 받은 선조가 군사를 이끌고 올라와 근왕(勤王)할 것을 명했는데, 백성들이 통곡하며 보호를 청하자 경상도 순찰사 김성일이 장계를 올려 사정을 알리자 선조는 본도에 머물러 백성을 수호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1593년 봄, 후퇴하는 왜군이 선산에 집결한다는 정보를 얻은 김면은 연합군을 편성하여 적을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쌓인 피로가 겹쳐 병을 얻었다. 이때 그는 “나라 있는 줄만 알았지(只知有國) 내 몸이 있는 줄은 몰랐네(不知有身)”라고 탄식했다. 3월 진중에서 순국하니 향년 53세였다. 김성일은 이렇게 장계를 올렸다. “그의 나라를 위하는 충성심은 맑고 훤하기가 붉은 구슬과 같았고, 그 가솔이 10리 밖에 있어도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장성이 한 번 무너지니 삼군이 모두 눈물을 삼키고 하늘이 돕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나이다.”

 

선조도 애도하여 예관을 보내고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추서했다. 4월에는 김성일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혹심한 병란에 백성은 굶주리고 여역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이에 성일이 직접 나아가 진휼하고 구제하면서 밤낮으로 수고하다가 여역에 전염되어 죽었다.(중략) 그는 임종할 때도 개인적인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 아들 김혁이 옆방에 있으면서 함께 걸린 염병으로 위독하였으나 한 번도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COVER STORY